<고의서산책/ 768> - 『政和本草』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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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768> - 『政和本草』①
  • 승인 2017.03.0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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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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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값대신 비방약초, 집념의 본초학자

조선시대 내내 가장 많이 이용된 본초서 가운데 하나이며, 전통약물학의 교과서라 할 이 책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집필된 1종의 본초서가 아니라 송대까지 내려오던 여러 종류의 본초서가 집약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원작은 宋나라 唐愼微가 편찬하였고 시기를 달리하여 수정 증보하여 중간되었기에 ‘證類本草’ 혹은 ‘備用本草’, 혹은 ‘大全本草’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약칭되었다.

모본이 되었던 ‘증류본초’는 1082년에 처음 완성되었으나 곧바로 간행되지 못하다가 1108년(宋·大觀2)에 다시 校正하여 『經史證類大觀本草』라고 이름 붙여 公刊하였다. 그 뒤 1116년(政和6) 다시 修補하여 『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라고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政和本草’라고 불렀다.(이상 296회 역대 본초서의 대표명저 - 󰡔經史證類備用本草󰡕, 2006년6월19일자 참조.)

책 내용에 앞서 오늘은 우선 원작자인 唐愼微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그의 본초서는 北宋대로 부터 明末 李時珍의『本草綱目』이 나오기 이전, 후대에 이르기까지 본초서의 典範을 이루었지만 의외로 그에 대한 사적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삼국시기 蜀나라의 근거지였던 四川省 成都에서 활약하였는데, 명석한 두뇌와 비범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생김새가 초라하고 촌스러웠으며, 말투조차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고 전한다. 병을 다스리는 데는 백발백중 효험을 보였지만 병증에 대해서는 몇 마디 설명밖에 해주지 않았기에 거듭 물을라치면 그만 성을 내면서 그만 두고 말았다. 그는 뛰어난 명성에도 불구하고 부귀빈천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병자의 부름에 응하였으며, 비바람이 불거나 춥고 더운 날을 피하지 않았기에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만일 사대부를 치료하게 되는 경우에는 치료비를 단 1푼도 받지 않는 대신, 효과 좋은 약이나 經史諸家書에 기록된 치료 처방을 청하였기에 士人들이 더욱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여러 해 동안 매번 여러 서적들에 기록된 약 이름과 비방들을 하나하나 모으고 기록하여 이 같은 불멸의 대작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증류본초』가 이루어진 뒤에 이 일을 맡은 尙書左丞 蒲傳正이이란 사람이 그 공을 높이 여겨 조정에 포상으로 관직을 내려주기를 주청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微官末職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두 아들과 사위 張宗說이 있었는데 역시 뛰어난 의술을 지녔기에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그 명성에 어울리게 기막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북송의 名臣이자 명망가로 이름났던 宇文虛中의 부친(宇文邦彦)이 風疾을 만나 여러 의원이 동원되었으나 모두 치료하지 못하였다. 결국 唐愼微가 나서고 나서야 효험을 볼 수 있었다. 치료를 다 마쳤으나 다시 서신 1통을 써주며 약조를 부탁하였다. 그의 말인즉, 이 병이 다시 재발할까 두려우니 나중에 때가 되면 열어보라 하였다.

과연 몇 해 뒤에 그 병이 다시 발작하였는데, 그제야 서찰을 뜯어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3가지 처방이 들어 있었는데, 맨 처음은 풍독이 재발한 것을 다스리는 것이었고 다음은 풍독이 위로 공격하여 瘡癰이 생긴 것을 치료하는 것이었으며, 그 다음은 다시 풍독이 위로 치솟아 호흡이 가쁘고 기침이 날 때 쓰는 약이었다. 이에 증상에 따라 약을 먹고 나니 반달 만에 다 나았다고 전한다.

이 사연은 1143년에 간행된 이 책 『정화본초』의 발문에 담겨져 있는 얘기인데, 작성자는 다름 아니라 이 醫藥史話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宇文虛中이다. 아비를 치료해 준 은공을 벼슬이 아닌 千秋에 빛나는 金字塔에 새겨 報應하였던 셈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식치융합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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