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의 부흥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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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의 부흥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신 분”
  • 승인 2017.04.0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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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균

고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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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기 - 경기도한의사회 제2회 역대의가 재조명세미나
◇그림1. 청강 김영훈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 김남일, 2017.3.18 세미나 발표자료 인용

경기도한의사회에서 주최한 ‘제2회 역대의가 재조명세미나’의 이번 주제는 ‘청강 김영훈’ 선생이었다. 무엇보다 근대사, 근대한의학의 인물이라는 점이 호기심을 끌었다. 이번 세미나는 한국의사학회 회장인 경희대한의대 김남일 학장을 비롯해 경희대 차웅석 교수, 세명대 김동율 교수 등 의사학자들이 세미나를 진행했다.

임상가에게 있어 김영훈 선생이라는 인물은 생소할지 몰라도 ‘청강의감(晴崗醫鑑)’이라는 책은 임상 처방서적으로서 시대를 뛰어넘는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로서 수많은 한의사 진료실 책장에 그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청강 김영훈’ 선생은 1882년 구한말에 태어나 1974년도에 작고한 분으로 한국 근대 한의학사에서 큰 영향을 미친 의가 중의 한명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가 가장 혼란스런 시기에 태어나서 한의학의 흥망성쇠를 직접 눈으로 지켜보고 한의학의 부흥을 위해 가장 많은 활동을 하신 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첫 발표를 한 김남일 교수는 ‘청강 김영훈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김 교수님은 다양한 사진 자료와 함께 큰 사건 위주로 발표를 했다. 청강 선생은 그 당시 임상가로서 이름을 떨치신 서도순(徐道淳)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의학에 입문 하면서,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교수가 돼 젊은 나이에 후학을 지도했다. 이후 ‘전국의생대회(全鮮醫生大會)’ 개최, ‘동서의학연구회(東西醫學硏究會)’ 조직, ‘동서의학연구소부속 의학강습소’에서의 활동, ‘동양의약협회’ 설립, ‘동양의학회’ 결성, ‘동양의약(東洋醫藥)’ 창간 등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많은 세월 동안 한의학 부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이 남겨져 있다. 

◇그림2,3. 청강 김영훈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 김남일, 2017.3.18 세미나 발표자료 인용

이중, 큰 의미로 와 닿은 것은 1915년의 ‘全鮮醫生大會’ 개최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고종황제의 후원에 힘입어 최초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의사 전체를 아우르는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암울한 시기에 어떻게 보면 한의학이 지닌 민족의학의 가치를 만천하에 알리는 일을 하신 것이다.

물론 임상 한의사로서의 역할에 있어서도, 1909년도에 종로 낙원동에 당시로는 획기적인 의원의 모델인 ‘보춘의원’을 개원하셔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많은 환자를 진료했다. 전통약방구조가 아닌 현대적 진료실 개념의 한의원 구조를 도입해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생각하니 이런 것도 다 의미있게 느껴진다. 

특히, 임상 개원의로서의 진료 자료를 손수 모두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청강의감’의 원천자료 였다. 이 내용은 차웅석 교수가 발표를 했는데, 수년간의 각고의 노력으로 데이터를 편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림4. 청강 김영훈 선생님의 의안, 차웅석, 2017.3.18 세미나 발표자료 인용

차웅석 교수가 발표한 자료는 청강선생의 자제인 ‘김기수’ 전 포르투갈 대사와 수제자인 이종형 교수가 1999년에 경희대학교 의사학교실에 기증한 자료(2012년에 문화제 등록)가 기초가 됐다.

청강선생의 꼼꼼함과 한의학에 대한 열정은 몇 가지 발표한 의안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 환자의 구체적인 증후 뿐 아니라 생활력까지 기록이 됐다. 중국 명대의 대표적 의안집인 ‘명의류안(名醫類案)’을 보더라도 청강선생과 같이 그렇게 섬세한 의학적 및 의학회적 사료적 특성을 지니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기록이 60년간, 6.25동란 때도 같은 양식을 써가면서 진료기록을 남겼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아마 모든 기록을 후대 한의학에 남겨주려는 목적이 있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특히 근대식 진료기록에서의 고민의 결과를 남겨주신 것이 감명 깊었다. 근대의 영향을 받기 전 청나라의 진료기록부도 맥상, 병리, 치료원칙 등을 기록했으나, 병명기록은 없었고, 1909년~1910년에 대한의사총합소의 진료기록부도 환증(患症)을 기록하고 병명기록이 없었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진단서 양식은 확실히 하나의 병명을 기록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중에 김영훈 선생의 진료기록은 병명에 병인 항목을 추가해, 진료기록을 기록한 것은 근대 의료시스템의 요구와 한의학 진단기록간의 고민의 결과의 단적인 사례로 보였다. KCD상병체계와 변증기록을 함께 고민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고민하는 것과 같은 고민을 하셨을 것이 내심 안타깝고 또 같은 한의사로서 감사했다.  

◇그림5. 청강 김영훈 선생님의 의안, 차웅석, 2017.3.18 세미나 발표자료 인용

세미나는 이렇게 두 교수님의 발표 이후, 경기도 한의사회 학술부회장인 동국대 김근우 교수과 세명대학교 김동율 교수도 함께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임상가에서도 관심이 높은 주제여서인지 많은 질문이 오가는 열띤 토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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