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서주희의 도서비평] 나는 용서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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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서주희의 도서비평] 나는 용서하고 싶어
  • 승인 2018.01.2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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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희

서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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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 용서의 나라: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용서가 유일한 길이야. 그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나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까."

세월이 많이 바뀌었나.. 아니면 그만큼 인식이 이제는 바뀌어야한다는 변곡점에 다다른 걸까.

희귀한 책이 한권 나왔다. 아니.. 이런 컨셉의 책이 다시 나올까 할 수 있을 정도로, 쓰여지기 쉽지 않았을 듯한, 그런 각성을 주는 책이다.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책이다. 심지어, Ted에는 같이 강연을 한다. 강간과 화해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이 같이 한 이 강연은 16년 전 강간의 진실을 증언한다. 이게 가능한 걸까? 책 발간 전에 그 테드 강연을 봤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크게 쳐다보았다. 설마 저 사람이 가해자? 무장한 미치광이가 아닌 멀쩡하게 잘 생긴 남자이다. 심지어 선하고 진실해 보이는 인상이다. 청소년지도사 일을 했고, 자선단체, 건축 및 서비스업 등 다양한 일을 했다고 한다.

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 著
권가비 譯
책세상 刊

흔히들, 성폭력이라고 하면 어두운 밤길을 가다가 험악한 인상의 덩치 큰 미치광이가 갑자기 피해자를 끌고 가서 범행하거나, 아니면 홀로 있는 여자 집에 무작정 들어온 낯선 사람에 의한 그런 범죄행위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피해자가 짧은 치마를 입었거나 헤프게 웃었거나 술에 취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폭력은 낯선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는 잘못된 통념 때문에 데이트 강간이나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피해자 스스로도 자신이 당한 게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린다. 아니 아예 영영 인식도 못한 채 본인이 잘못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해서 평생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살지도 모른다.

성폭력 실태를 살펴보면,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훨씬 더 많이 발생한다. 상담원, 연구자들은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여러 면에서 숨겨지고 있지만 오늘날 가장 흔한 형태의 강간 범죄"라고 말한다. 특히나 아동 성범죄는 아는 사람에 의한 경우가 80%가 넘는다.

1982년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와 페미니스트 저널인 《미즈 매거진》이 공동으로 미국 전역의 32개 대학에 재학 중인 총 6천100여 명의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한 여성 가운데 4명 중 1명꼴로 강간 혹은 강간 미수 피해 경험이 있었고, 이 중 84%는 가해자와 친분이 있는 관계였다.

강간 피해의 57%는 데이트 중에 발생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강간이라 부르지 않았다.

피해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남성들 또한 '데이트 성폭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해 남성은 피해 여성과 친분이 있었던(84%)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가해 남성들이 언급한 사건 중 실제로 경찰로 신고 된 경우는 2%에 불과했다.('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중에서)

이 책은 그러한 배경과 함께 하고 있다. 저자 역시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 ‘강간’이라는 걸 인지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그녀 역시 ‘강간’이란 으슥한 골목길에서 칼을 든 미친 사람에게 끌려가서 당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녀는 술에 취해 있었고, 가해자는 그녀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둘 사이 성관계도 있었지만, 이렇게 본인의 의사는 처절히 배제된 채 강제된 폭력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엄연히 성폭력인 것이었다. 그로 인해 저자는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자해 등 몸부림치다가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절망에 빠져 흐느끼다가 끄적인 낙서에서 '나는 용서하고 싶어'라는 문장을 쓰게 된다.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나서 절실한 후회로 가득한 진솔한 답장을 받게 되었다. 가해자였던 그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잊고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8년간 서신교환이 오갔지만, 그렇다고 그게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이 인생을 망가뜨릴 수 없고 선택을 제한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스스로를 위해 용서를 선택하고 인생의 한 단원을 마무리하기위해 가장 당당하고 정직한 방법으로 직접 만나기로 결심한다. 오직 용서를 목적으로... 가해자 역시 어두운 비밀을 가지고, 진솔한 관계를 하지 못한 채 자기혐오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역시 진심어린 참회와 치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중간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곳이 바로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 강간률이 세계 최고이고, 심지어 그 나라가 cape of rape 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만난다. 참으로 인생은 이런 식으로 아이러니하게 그들을 반겨주고 있지 아니한가.

"내 생각엔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인과응보보다 네가 스스로에게 가한 징벌이 효과적이었어......처음 몇 해 동안 감옥에 있던 사람은 나였어. 난 내 잘못이라고 스스로를 비난했지. 다른 사람들, 특히 날 사랑한다던 사람조차 나를 쓰레기 취급하는데 내가 어떻게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가 있었겠어..... 하지만 처벌의 시간은 끝났어. 이제 치유의 시간이야. 그래서 우리가 직접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두려움과의 맞대면이 둘 모두의 주제였고, 이 주제가 지속되고 이 교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기로 결심하기까지, 그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옥과 같았던 이 작업을 진행하고 여기까지 나온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토르디스 뿐만 아니라, 문제의 한축이 아니라 해결의 한축이 되고자 애쓴 스트레인저에게도. 아마 역사상 생존자와 가해자가 이리 치열하게 소통하고 용서와 화해로 이어진 사례가 있을까?

16년 만에 조우한 서로는 케이프타운에서 일주일간의 시간동안 정말 치열하게 서로를 내보인다. 처절하리만큼, 또한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이들의 이야기는 성폭력이 만연한 오늘날의 현실을 일깨우며, 더 이상 이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남녀가 함께 동참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현재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뜨겁다. 하루만에 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8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의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맥케일라 마루니와 리즈 위더스푼, 안젤리나 졸리, 귀네스 팰트로, 영국 성공회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으며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SNS상에서 이렇게 뜨겁게 달궈진 운동이, 인터넷과 SNS에 있어서는 초강대국이라 불리울 만큼 발전한 우리나라에서는 왜이렇게 발화가 되지 않는 것일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치명적인 것이다. 섣불리 나섰다가 반대로 쯔나미처럼 몰려올 2차 피해가 더 무서운 것이다. 용기를 내서 사회적으로 이슈화해도 주변 사람들의 삐딱한 시선과 낙인, 회유나 협박 등... 그야말로 누더기가 된다.

아직 이 땅엔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발하고 공론화한 피해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뢰도 경험도 없다는 게 어떤 현직 변호사의 말이다.

성폭력은 생존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성폭력을 극복하려면 공동체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자라야 하고, 생각을 다듬고 노력을 합쳐야 한다. 절대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 기저에는 젠더불평등과 성폭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가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문제도 아니다. 이런 책이 나오고, 이런 ted강의가 널리 펴지고, 미투 운동이 확산이 되고.. 이런 신호가 변화의 바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자인 토르디스는 그날 밤 강간을 막을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나, 바로 그녀를 강간한 남자라 말한다. 톰 역시 이것을 인정하고, 이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진정한 책임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제 더 이상 성폭력을 여성의 이슈로 한정짓는 것을 멈추고 함께 가야할 때이다.

서주희 / 국립중앙의료원 한방신경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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