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질침에서 병근(病根) 개념이 도출된 과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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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침에서 병근(病根) 개념이 도출된 과정(1)
  • 승인 2018.02.02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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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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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고문은 이강재 선생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무관합니다.

체질침은 질병을 치료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체질침의 체계는 병리적인 원리에 따라 구축되어 있다. 체질침에서 병리를 논할 때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개념이 바로 병근이다. 병근(病根, disease-origin)이란 병원(病原)이라고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 병의 뿌리라는 뜻이다. 질병의 시초이고 질병의 원인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8체질은 각각 독자적인 병근이 있다.1) 이것은 바로 체질침이 성립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병근이란 용어는 권도원 선생이 1963년 10월에 쓴 [체질침 치험례]2)에 처음 나온다. 그리고 권도원 선생은 이후에 체질침 논문을 통해서 병근이라는 용어와 병근의 정의를 제시하였는데, 8체질에서 병근이 도출된 원리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하지 않았다. 또 이후에는 8체질의학을 공부하는 후학 중에서 어느 누구도 이것을 주제로 탐구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창시자가 제시하는 용어이니 그냥 받아들인다는 태도였는지는 모르겠다.

체질침의 치료체계는 병근을 기본으로 시작한다. 8체질에 각각 독자적인 병근이 있다는 것은 병근이 각 체질의 질병을 바라보는 기준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병근이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왔을까?

권도원 선생은 한의과대학을 다니지 않았고 검정시험을 통해서 한의사가 되었다. 한의사면허를 받은 것이 1962년 4월이다. 한의사면허를 받기 전에 이미 7~8년간 한방계(漢方界)에 몸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권도원 선생이 한방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접한 한의학 서적은 무엇일까?

한반도의 자랑스러운 의서 『동의보감』일까? 권도원 선생은 1954년쯤에 서울시 중구 다동(茶洞)에 있던 사상회관(四象會館)에 가서 이현재(李賢在) 선생을 만나고 사상의약보급회(四象醫藥普及會)의 멤버가 된다. 그리고 이현재 선생으로부터 체질을 감별 받고 사상의학을 배운다. 사상의약보급회에서는 등사본 『동의수세보원』을 발간3)하기도 했다. 권도원 선생이 처음 접한 한의학 서적은 황제내경도, 상한론도, 동의보감도 아닌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상회관에는 한국전쟁 전에 이현재 선생이 함흥에 가서 동무 공의 제자들을 만나 구해온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었다.4) 그것을 또한 권도원 선생이 섭렵했을 것이다. 그 자료 중에는 1896년에 동무 공이 처음 완성한 동의수세보원의 구본(舊本)5)과 관련한 것도 있었다. 사실 한의학계에 동의수세보원 구본과 관련한 정보가 공식적으로 전해진 것은 이 시대보다 한참 후대의 일이다. 동무 공의 후손인 이진윤(李鎭胤)6)이 지니고 있던 것을 그의 아들 이성수(李聖洙)가 2000년에 공개한 이후의 일인 것이다. 그 자료는 바로 「함산사촌동의수세보원갑오구본(咸山沙村東醫壽世保元甲午舊本)」이다.

권도원 선생이 이현재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동의수세보원의 구본 자료를 본 것이 왜 중요한가. 그리고 구본 자료를 보았다는 증거가 남아 있는가.

권도원 선생은 한의사가 되기 전부터 홍순용(洪淳用) 선생과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 모두 열성 기독교인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신학대학을 다닌7) 공통점도 있다. 무엇보다 사상의학(四象醫學)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홍순용 선생은 위에 소개한 이진윤으로부터 배웠고, 보원계(保元契)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현재 선생이 주도하던 사상의약보급회나 1957년에 창립한 사상의학회(四象醫學會)와는 별도의 사상의학 관련 모임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970년에 한의과대학에 있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대한사상의학회(大韓四象醫學會)를 결성할 때 초대회장을 맡게 된다.8)

권도원 선생은 한국신학대학 신과를 졸업한 1958년에, 영어 공부를 위해 서울대 문리대에 개설된 E.L.I.에 다니던 중에 실명(失明)의 위험에 처할 정도의 눈병에 걸렸다. 안과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더 심해져서 침 치료를 받을 생각을 한다. 그럼 누구에게 제일 먼저 가야 할까.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가장 믿을 만한 한의사에게 갔을 것이다. 그렇다. 덕일한의원 홍순용 한의사는 1958년에 권도원이 가장 믿는 한의사였다. 결과론이지만 홍순용 선생은 권도원 선생의 눈병을 고치지 못했다.

1965년에 홍순용 선생은 대한한의학회의 이사장이었다.9) 그리고 그 해 10월에 도쿄에서 열리는 국제침구학회(國際鍼灸學會)에 참가하기 위한 절차를 밟던 권도원 선생은 대한한의학회의 예상치 못한 제지를 받는다.10) 그가 가지고 나가려는 논문의 내용이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으므로 한의사협회 동료들 앞에서 시연을 하고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1958년부터 1965년 사이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권도원 선생은 1965년 5월 9일에 열린 제1회 종합학술강좌11)에서 ‘체질침의 이론과 실제’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체질침(體質鍼) 논문 내용 일부를 발표한다. 그리고 6월 8일에 회원들 앞에서 체질침의 실기를 보였고, 지방을 도는 순회강좌12)에도 나갔다. 이런 절차를 거쳐서 권도원 선생은 국제침구학회 참가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10월에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에 도쿄에서 논문을 발표할 때 쓴 발표문이 『대한한의학회보(大韓漢醫學會報)』에 실린다.13)

홍순용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1965년 12월 20일자 약업신문(藥業新聞)과, 1966년 1월 『대한한의학회보』 제22호에 〔체질침에 대한 소론〕을 기고하여, “체질침은 아무리 탐색하여 보아도 그 장부론이 비수세보원적이므로 이 학설은 긍정과 부정에 앞서 심각히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외우(畏友)’라고 칭한 권도원 선생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권도원 선생은 『대한한의학회보』 제23호에 바로 반론을 쓴다.14) [묵살 당한 진리]는 권도원 선생이 동무 이제마의 사상인(四象人) 병증론(病證論)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개념으로 녹여냈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논설이다.15)

이 글 중에 동의수세보원 구본의 편명(篇名)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1901년에 나온 『동의수세보원』의 초간본(初刊本)인 신축본(辛丑本)에 표현된 사상인 병증론 편명은 아래 표와 같다.

동무 공은 1894년에 동의수세보원을 처음 완성16)하고 1900년에 별세할 때까지 원고를 계속 다듬고 고쳤다.17) 그런데 표에서 보이는 것처럼 태양인 병증론은 편명과 내용을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본에 사용한 병증론 편명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이것을 토대로 구본의 편명이 외감병(外感病)과 내촉병(內觸病)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2000년에 이성수가 갑오 구본 자료를 공개하기 전까지 그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었다.

「함산사촌동의수세보원갑오구본」을 통해 알려진 구본의 병증론 편명은 다음과 같다.

권도원 선생은 1966년 2월에 기고18)한 [묵살 당한 진리]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李濟馬先生의 體質論的 硏究의 過程을 살펴보면, 四象人의 病論을 그의 처음 草稿에서, 少陰人病은 外感病과 內觸胃病으로 分類하였으며, 少陽人病을 外感膀胱病과 內觸大腸病으로 分類하였다. 그러나 그의 硏究의 進行과 함께 臟腑論이 分明해짐에 따라 少陰人의 外感病을 腎受熱表熱病으로 그리고 內觸胃病을 胃受寒裡寒病으로 結論하고, 少陽人의 外感膀胱病을 脾受寒表寒病으로 內觸大腸病은 胃受熱裡熱病으로 結論하여 「壽世保元」에 記錄하였다.”

“나머지 두 體質에 있어서는 李濟馬先生이 처음에 太陰人病論을 外感腦頁病과 內觸胃脘病으로 定하고, 太陽人病論은 外感腰脊病과 內觸小腸病으로 定하였으나, 後에 太陰人의 胃脘病은 內觸病이 아니고 外感病이며, 內觸病은 肝熱病임을 알게 되어 外感病을 胃脘受寒表寒病으로 內觸病을 肝受熱裡熱病으로 고쳐 記錄하였으며, 太陽人病論은 그나마 고쳐보지도 못한 채 처음 그대로 外感腰脊病과 內觸小腸病으로 「壽世保元」에도 記錄하고 있는 것이다.”<다음 호에 게속>

 

각주

1) 목양체질을 예로 든다면, 목양체질의 최강장기인 간(肝)이 ‘더 강(强)해지려는 상태(肝實)’가 바로 병근이 된다. 반대로 금양체질은 최약장기인 간이 ‘더 약(弱)해지려는 상태(肝虛)’가 병근이다.

2) 1963. 11. 『대한한의학회보』 7호. p.4~5

3) 1955년 8월

4) 그 형태는 아마도 필사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현재 선생의 방에는 동무 공의 초상(肖像)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염태환 선생의 증언-
   이현재 선생은 이 초상을 동무 공 탄신일을 기념하여 일간지에 기고문을 실을 때 함께 실었고, 행림서원에서 『동의수세보원』을 출간할 때 책머리에 실었다.

5) 동의수세보원 草稿. 甲午本

6)  이진윤은 동무 이제마의 두 살 아래 이복동생인 이섭증의 손자이다.

7)  권도원 선생은 한국신학대학에, 홍순용 선생은 서울중앙신학교에 다녔고 같은 해(1958년)에 졸업했다. 홍순용 선생은 권도원 선생보다 나이가 많고(1909~1992), 1958년에 검정시험을 통해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다. 

8) 1957년 4월 30일에 먼저 사상의학회를 창립했던 이현재 선생은 고문으로 추대된다. 이현재 선생은 한의사면허가 없었다. 

9)  1965년 4월 20일에 제3대 대한한의학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10)  국제학회에 참가하려고 외무부와 보건사회부를 찾아 갔더니 해당 협회의 추천서를 받아오라는 권고를 받는다. 그래서 한의사협회를 찾아 갔더니 그 업무를 대한한의학회로 미룬 것이다. 그 이전에 대한한의사협회에 속한 한의사가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터라 관련 부처들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개념이 없었다.  

11)1965년 5월 5일부터 5월 9일까지 서울시한의사회와 대한한의학회가 공동주최하였다.   

12)6월 16일은 인천에서, 6월 18일은 수원에서 ‘체질침의 이론과 임상’이란 제목으로 강의했다.

13)1965년 12월에 나온 『대한한의학회보』 제21호에는 영문발표문이, 그리고 1966년 1월에 나온 『대한한의학회보』 제22호에는 번역문이 실린다. 

14)이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두 사람이 멀어진 것은 사상의학에 대한 해석상의 견해 차이인 것 같다.

15) 나는 사상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1997년 이후로, 내가 읽었던 모든 사상의학 관련 논편(論篇)에서 권도원 선생만큼의 깊이를 보여주는 글을 만난 적이 없다.


16)甲午本 / 舊本

17) 庚子本 / 新本

18) 『대한한의학회보』 제22호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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