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병은 象徵이다
상태바
눈병은 象徵이다
  • 승인 2018.05.11 07: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재

이강재

mjmedi@http://


신약성경(新約聖經)의 사도행전(The Acts)에 사도(使徒) 바울의 이야기가 나온다.1)

길을 가다가 오정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나타나 내 주위에 두루 비쳤습니다. 내가 땅에 거꾸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 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신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주께서는 ‘일어나서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거기에 가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못 보게 되어 같이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거기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찾아와 곁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이 띄어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사울은 바울(Paul)로 개명하고 사도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권도원 선생에게도 눈(眼)에 연관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눈병이 생겼고 안과와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더욱 심해져서 급기야 실명의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이 눈병 사건은 권도원 선생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권도원 선생은 한국신학대학 신과(神科)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졸업 후에 목회(牧會) 활동을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로 목회자의 길은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카운슬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자 마음을 바꾼다.

이현재 선생이 이끌던 사상의약보급회는 1957년 4월 30일에 사상의학회를 창립한다. 사상의학회의 부회장이던 권도원 선생은 미국에서 배워 올 카운슬링에 신학지식과 체질연구의 결과를 응용하는 카운슬러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유학 준비로 서울대 문리대에 개설된 E.L.I.2)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한 후 1주일 만에 돌연히 눈병이 생겼던 것이다. 아마도 1958년 전반기쯤이었을 것이다.

눈병이 생기자 일단 서울대 문리대3)에서 가까운 안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안과에서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부작용으로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한쪽 눈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고 거의 실명하다시피 되었다.

권도원 선생은 정식으로 한의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또 사상의학에는 침을 이용한 치료법이 없다. 그러므로 당연한 거겠지만 사상의약보급회와 사상의학회에서 활동하던 중에도 침술(鍼術)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실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한의학의 침술을 떠올린다.4)

생각을 해보자. 지친(至親)이 몹시 아프다. 혹은 내가 아주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병원에 가서 약물치료를 받았더니 부작용이 생기고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한의학의 침술을 떠올렸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인 중에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찾아가야 하나? 답은 간단하다.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을 찾아가면 된다.

물론 권도원 선생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는 제일 먼저 종로 4가에 있던 홍순용(洪淳用) 선생5)에게 갔다. 홍순용 선생은 권도원 선생과 같은 기간에 신학 공부를 했다.6) 신앙(信仰)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관심도 비슷했다. 홍순용 선생은 소양인답게 과감하게 외우(畏友)에게 침을 놓았다. 하지만 이 또한 증상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한 번의 시도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학로에서 가까운 성화당(聖和堂)한의원으로 갔다. 거기에는 동양의대에 출강하던 노정우(盧正祐) 선생이 있었다. 권도원 선생은 사정을 설명하고 침 치료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노정우 선생은 권도원 선생의 상황을 보더니 자신은 치료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7) 성화당을 나오다가 문득 권도원 선생에게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이런 것이다.

‘침을 맞고 병이 악화되었다는 것은 어떻든 침이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닌가!’8)

그래서 돌아 들어가서 노정우 선생에게서 침을 얻어가지고 나왔다. 스스로 침을 맞아봐야겠다고 작정을 했던 것이다.

 

이후의 진술은 이렇다.

눈병이 나기 전에는 침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지만 뭔가 새로운 증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여기저기 몸을 찔러보았다. 며칠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어느 날 아침에 찌른 침이 반응을 나타냈다. 우연히 발목 쪽의 어느 한 곳을 찔렀는데 다음 날 눈이 밝아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침으로 놀랍게도 눈병이 나았다. 나중에 홍순용 선생에게 그 포인트에 대해 문의해 본 결과 그곳이 간경(肝經)의 여구(?溝)라는 경혈이고, 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권도원 선생은 어린 시절 고기를 먹는 날이면 늘 탈이 났던 경험과 소학교 시절 금니 때문에 고통 받았던 경험, 그리고 위인전을 통해서 알게 된 채식주의자에 관한 지식 등을 토대로 사람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런 후에 사람의 행태를 관찰하면서 인간의 본질과 차이에 관한 궁금증을 늘 지니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상의약보급회에 들어간 후에 이현재 선생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이 간(肝)이 약한 태양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침술을 통해서 눈병이 치료되는 경험 앞에서 그는 미국 유학을 포기한다. ‘사람은 왜 다른가, 사람의 본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푸는 데 전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문제를 풀기 위한 통로로서 침술에 매달렸고 특히 경락의 신비함에 눈을 떴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락이 바로 생명 본체의 통로라는 깨우침이었다.

권도원 선생의 눈병 일화는, 1) 눈병이 나기 전에는 침술에 관심이 없었다. 2) 돌연히 눈병이 생겼다. 3) 안과에서 약을 복용하고 침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4) 스스로 침을 맞았다. 여구혈에 침을 맞은 후에 눈병이 나았다. 5) 경락과 침술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권도원 선생이 알리고 싶었던 눈병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사울은 너무나 밝은 빛을 본 후 눈이 멀고 다시 광명을 찾은 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였다. 권도원 선생은 양방과 한방치료가 모두 효과가 없었고 도리어 악화되어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가, 스스로 맞은 침을 통해서 눈병을 고쳤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과 사람들의 몸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후, 애초에 목표했던 꿈을 접고 본격적인 체질연구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권도원 선생이 앓았던 눈병은 어떤 안질(眼疾)이었던 것일까? 증상의 양태는 어떠했을까? 하지만 권도원 선생은 일체의 설명을 배제하고 단지 ‘눈병’이라고만 지칭하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병’은 인생의 전환점을 가리키는 중요한 상징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친견(親見)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아니다. 스스로 사도가 된 그에게는 대중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뚜렷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전혀 만난 적도 없는 예수의 목소리’를 혼자서만 들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박해하는’ 사울에서 ‘사도’ 바울로 스스로를 변신시켰다.

권도원 선생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자침(刺鍼)을 통해서 눈병을 고치고, 경락과 생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고, 인류 역사 최초의 새로운 체질치료법을 고안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체질침(Constitution-Acupuncture)이다. 체질침(體質鍼)은 사상의학으로부터는 장부(臟腑)의 관계론(關係論)을, 사암침법(舍岩鍼法)으로부터는 장(臟)과 부(腑)의 허실보사법(虛實補瀉法)을 가져와서 결합시킨 체질론적 침치료법이다.

눈병은 그저 눈병으로 충분하다. 구체적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상징이기 때문이다.

경락과 침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이 혼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임의로 찌르던 중에, 우연히 어떤 특별한 자리를 찔러서 자신의 눈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아주 부족하다. 권도원 선생은 ‘눈병’ 이야기 뒤에 많은 것을 숨겨 두었다. 그런데 숨겨지지 않고 오히려 도드라지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여구혈이다. 여구는 간경의 낙혈(絡穴)이다. 여구는 사암침법에서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체질침의 치료혈로도 사용되지 않는다.9)

여구혈이 바로 스모킹 건(smoking gun)이다. 체질침 탄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였던 것이다.

 

※ 참고 문헌

1) 8체질의학회 『8체질건강법』 1996. 10. 고려원

2) 『미래한국』〈357호〉2009. 11. 18.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사도행전 22장 6절~13절

2) English Language Institute

3) 당시에 서울대 문리대는 대학로인 동숭동에 있었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있는 자리다.

4) 실명의 위기에 처한 권도원 선생이 침술을 떠올리는 이 부분은 앞뒤의 맥락(脈絡)이 매끄럽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5) 홍순용 선생(1909. 6. 28.~1992)이 운영하던 덕일한약방은, 선생이 1958년에 한의사검정시험 과정을 통과한 후 1959년에 덕일한의원으로 바뀌었다.

6) 1958년 3월 5일에 서울중앙신학교 신과를 졸업하였다.

7) 노정우 선생은 소음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8) 이 대목 역시 매끄럽지 않다. ‘침이 영향을 미친다’는 권도원 선생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침을 맞아서 악화된 것인지, 병이 진행되어서 악화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9) 다만 「62 논문」에서 체질침의 부작용을 해제하는 방법에 낙혈을 응용한 적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