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다방 위 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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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다방 위 4층
  • 승인 2018.06.09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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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http://


권도원 선생이 체질침(體質鍼)을 고안1)한 후에 처음 치료한 환자는 이현재(李賢在) 선생의 비서였다. 그 비서는 오래된 항문출혈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권도원 선생의 간단한 치료 한 번에 바로 지혈이 되었다. 체질침은 첫 치료에서 아주 훌륭한 효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이현재 선생은 방을 하나 비워서 권도원 선생이 침 치료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날 그 비서의 지인이 사상회관(四象會館)을 방문했다가 권도원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고질적인 불면증으로 수년간 하루도 편히 잠을 자보지 못했다고 호소하였다. 비서는 자신이 직접 치료를 받고 효험을 보았으니 지인에게 치료를 받으라고 권유하였다.

그렇게 치료를 받고 이 사람의 불면증이 거짓말처럼 나아 버렸다. 권도원 선생이 구사하는 체질침의 치료효과는 경이로웠다. 불면증이 치료된 분은 명동(明洞)에 빌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무실 하나를 빌려줄 터이니 거기에 와서 ‘신비한 침’ 실력을 발휘해보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 빌딩에는 2층에 도심다방이 있었고, 그 건물의 4층이 이 사람의 사무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을 내어주었던 것이다.

나는 도심다방 위 4층이 궁금해졌다. 경향신문 1968년 9월 16일자 기사에서 도심다방의 주소를 발견했다. 도심다방이 있던 건물의 주소는 ‘서울시 명동1가 174번지’였다.2) 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간한, 『서울지도』에 이 건물과 관련한 자료가 있었다. 대한안내사에서 1961년에 4.19의거 1주년을 맞아 발행한 [서울안내-제3호 명동편]이라는 명동의 상계(商界) 안내도이다. 안내도에서 ‘명동극장’이라고 적힌 사진에서 보면 앞으로 가까운 쪽에 희미하게 1층의 돌출간판이 보인다. ‘동경제과’이다. 그리고 옆에 붙은 건물이 명동극장이다.

그 다음에 상가들이 표기된 지도 부분에서 도심다방을 찾았다. 지도에 붉은색으로 표시한 사각형 안에 명동극장3)이 표기되어 있고, 그 옆 건물에 동경제과와 도심다방(2층)이 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건물의 이름이 나온다. ‘국제삘’ 즉 국제빌딩이다. 권도원 선생에게 불면증을 치료 받은 사람이 가진 명동의 빌딩은 국제빌딩이었다.

체질침의 경이로운 치료효과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퍼졌다.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치료를 받으러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건물 안에 다 못 들어가고 길가에 장사진을 치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권도원 선생의 부인이 어느날 명동에 나왔다가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궁금해서4) 줄에 선 사람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용하다고 소문 난 침술가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답하더라는 것이다. 그 용한 침술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남편인 것을 알아차리고 놀랐다고 한다.5)

사상의약보급회(四象醫藥普及會)에서 동갑내기인 권도원 선생을 만나서 친구가 되었던 배은성(裵恩成) 선생6)은 1960년 2월에 동양의대를 졸업7)하고 을지로2가에 은성한의원을 개원한다. 한옥 양식으로 2층으로 지은 건물인데 한의원은 2층에 있었다.

찾아오는 환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친구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를 아는 사람들이 권도원 선생을 데려다 해보라고 조언을 했다. 사실 을지로2가는 사상회관이나 명동 도심다방에서도 가까운 거리다. 배은성 선생은 명동 국제빌딩 4층으로 친구를 찾아갔다. 소문대로 환자가 늘어서 있었다. 그는 권도원 선생에게 은성한의원에 와서 치료 활동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권고를 했다. 그렇게 해서 권도원 선생의 세 번째 ‘체질침 치료소’8)는 은성한의원이 된다. 권도원 선생은 그곳에서 6-7개월 정도 치료를 했다. 그런데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지는 않았다.

배은성 선생은 동양의대를 다닐 때 그곳에 출강을 하던 노정우(盧正祐) 선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에게도 소개를 시켜 주었다. 권도원 선생은 노정우 선생의 성화당한의원과 홍순용 선생의 덕일한의원을 찾아다니면서 진료하는 장면을 관찰하기도 했다. 특히 홍순용 선생과 권도원 선생의 관계는 아주 각별했다.

권도원 선생이 성화당한의원에서 참관하던 때다. 젊은 여학생이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그걸 보다가 권도원 선생이 노정우 선생에게 자신이 한번 치료해보면 안되겠느냐고 요청을 했다. 배은성 선생이 전하기를, “노정우 선생은 학문에 뜻이 깊고 늘 무엇을 배우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배움에 있어서는 겸손했다”고 한다. 노정우 선생은 화를 내지 않고 그러라고 허락을 했다. 그래서 권도원 선생이 그 여학생을 몇 번 치료했는데 병이 나았다.

삶은 관계로 엮인 인연(因緣)의 그물이다. 권도원 선생은 사상의약보급회에서 이현재 선생을 만났고, 동갑내기 친구 배은성 선생을 소개 받는다. 배은성 선생은 동양의대에서 알게 된 노정우 선생을 친구에게 소개해 준다.

노정우 선생이 권도원 선생의 재주를 아꼈다. ‘한의계로 들어오면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노정우 선생은 당시에 각종 한의약 관련 국가시험의 출제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시험 일정과 내용에 관한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 1960년 6월 1일에 제10회 한의사국가시험 응시자격검정시험의 공고가 났고, 어느날 노정우 선생이 위생학(衛生學) 책 한 권을 들고 권도원 선생을 찾아가게 된다.

 

※ 참고 문헌

1) 8체질의학회 『8체질건강법』 고려원 1996. 10.

2) 『미래한국』 〈357호〉 2009. 11. 18.

3) 『서울지도』 서울역사박물관 2006. 12. 20.

p.151 서울 商界略圖

p.153 서울안내-제3호 명동편

4) 『명동:공간의 형성과 변화』 서울역사박물관 2011. 12.

민족의학신문 1128호(2018년 2월 1일)부터 연재하고 있는 저의 글쓰기는 「時代를 따라 떠나는 體質鍼 旅行」이라는 테마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때그때 떠올린 주제를 쓰다 보니, 글이 年代 順序를 따르지 않게 되어 전체적인 글의 내용은 좀 산만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 독자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아울러 귀한 紙面을 할애해 준 민족의학신문사에 깊은 謝意를 표합니다.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1958년 末과 1959년 初 사이였을 것이다.

2) 현재의 주소는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78’이다.

이 건물은 4층인데 지금은 1층에 화장품을 파는 MISSHA가 있다.

3) 사진 속의 명동극장은 작은 극장이다.

명동(明洞/本町)에는 일제시대인 1936년에 일본인 이시바시가 세운 ‘명치좌(明治座)’라는 유명한 극장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국제극장으로 불리다가 서울시가 접수하여 시공관이라고 개칭하였다. 1959년 6월 1일에 국립극장이 되었다가, 국립극장이 장충동 신축 건물로 이전하면서 1973년에 예술극장이 되었다. 1975년부터는 금융기관의 영업장으로 사용되다가, 2009년 6월 5일에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였다.

4) 권도원 선생의 부인은 8체질 중에서도 ‘호기심이

가장 많은 체질’이라고 알려져 있다.

5) 배은성 선생의 傳言이다.

6) 1922. 1. 22. ~ 2013. 8. 31.

7) 동양의대 56학번 9회 졸업

8) 배은성 선생과 2010년 2월 21일 오후 1시부터 2시

까지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면담하였다.

나는 1960년 당시의 체질침 시술방식이 궁금했다. 그래서 면담할 때 이것을 먼저 여쭈었다.

“留鍼하지는 않았다. 이곳저곳 왔다갔다 하는 시술법을 썼다”고 답변하셨다.

배은성 선생은 아버님이 목사님이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권도원 선생이 아주 똑똑해서 아버님의 교회에 초청하여 권도원 선생이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신대를 졸업할 무렵 권도원 선생의 괴팍한 성품을 아는 주위 사람들이 권도원 선생이 목회자로 나서는 것을 말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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