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었던 한의사 제도 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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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었던 한의사 제도 입법
  • 승인 2019.06.1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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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안

이종안

mjmedi@mjmedi.com


배원식 선생을 회고하다(4)
제2대 국회

한의사 제도를 배제하고 양의 단일법안으로 국민의료법안을 제정하려던 기도는 서울에서 피난을 내려간 김영훈, 방주혁, 박호풍, 박성수, 배원식 선생 등의 정치적 기반 활용과 부산지역에서 경제적 기반을 탄탄하게 닦아 놓은 이우룡, 윤무상, 우길룡, 권의수, 정원희 선생 등 5인동지회의 재정적 뒷받침, 부산동양의학전문학원생들의 활약,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노력을 기울인 수많은 선배 한의사들의 천신만고 노력 끝에 일단 제지됐다.

말 그대로 이들 선배 한의사 분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오직 한의학과 한의계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아 부은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의료법의 제정 과정에서 한의사 제도를 배제하려는 양의 측의 기도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의사출신 인사들을 총동원해 입법을 반대하는 등 집요하리만큼 이어졌고 법안 표결의 키를 쥐고 있던 국회의원 중에서도 상당수가 국민의료법에 한의사 제도를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나서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사회보건위원회 박영출 위원장이 국민의료법안에 한의사 제도를 포함시킨 내용을 설명하면서부터 현실로 다가왔다.

당장 국회 본회의의 의료법안 심의가 시작되고 한국원 의원과 엄상섭 의원이 발언이 이어진 후 한의사의 호칭에 사용될 ‘師’자와 ‘士’자에 대한 설전과 공방이 오갔다. 결국 신익희 국회의장이 사회보건위원회가 제출한 수정안, 즉 명칭을 ‘漢醫師’로 하는 안을 표결에 붙인 결과 가결됐다. 위기 속에서 또 한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이어 논의된 의제는 기존에 사용되던 ‘진료소’를 ‘한의원’으로 명칭 변경하자는 김익기 의원의 수정안이었다. 이미 국민의료법안 제안 당시부터 한의사 자격을 의사와 차별해 격하시킨 내용을 담아 제출했던 한국원 의원은 진료소를 한의원으로 변경하면 의원의 수준이 저하되는 만큼 진료소라는 명칭을 그대로 두자고 했다. 여기에 더해 이용설 의원은 아예 한의원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또 한 번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이들 두 의원의 발언과 관련 김익기 의원은 “이용설 의원의 발언 중 한의원을 법문으로 넣을 수 없다는 것은 대단히 모순되는 말이다. 한의사가 있으면 한의원이라 하는 것이 정당한 법문이며,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한의사를 모독하는 것이다”라고 반박하는 의견을 개진, 경청하던 국회의원 다수의 공감을 얻어냈다. 결국 설전이 오가던 수정안은 표결에 붙여진 끝에 재석 113명 중 가 75, 부 3으로 통과됐다.

이렇듯 한의사의 호칭에 ‘師’자를 붙이는 것과 기존 진료소의 명칭을 한의원으로 변경하는 의제는 일정 부분 한의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과됐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던 국민의료법의 의결, 바로 한의계의 숙원이 담긴 이원제 국민의료법에 관한 의결이 남아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원제 국민의료법의 의결은 수월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표결에 앞서 김익기 의원이 먼저 “전통 있는 한의학을 보다 발전시켜 가지고 국민보건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의사, 치과의사와 같은 제도 하에서 한의사의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이 안심하고 한의사에게 질병치료를 맡길 수 있다”고 제안 설명을 했다.

반면 유홍 의원은 작심한 듯 한의사의 존재 인정은 시대역행이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발언에 나선 임영신 의원은 “우리 한국에서는 외국의 흉내만 내지 말고 한의학이 과학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김익기 의원 안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한한의사회 설립신청서

선배 한의사들 각고의 노력, 이원제 국민의료법 공포

결국 찬반토론을 마친 이원제 국민의료법안은 표결에 붙여졌고 재석 116명 중 가 61, 부 18로 김익기 의원이 제안한 이원제 국민의료법안이 마침내 통과됐다.

말 그대로 일제에 의해 의생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으며 빈사 상태에 빠졌던 한의학과 한의사가 현재의 한의사 제도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국민 보건을 책임지는 치료의학의 한 축으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전기가 된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원식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한의계의 숙원이었던 국민의료법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국민의료법 통과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왔던 한의계의 선후배 인사들과 국회 방청석에서 응원을 통해 한의사 제도 확립에 공헌한 바 있던 부산동양의학전문학원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을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원제 국민의료법은 1951년 9월 25일 법률 제221호로 공포됐다.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국회에서 제정된 국민의료법은 전문 10장 66조 부칙으로 구성됐지만 새로 제정해 현대 의료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일제의 ‘조선의료령’ 잔재가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의료업자라는 호칭 하에 <제1종> 의사 치과의사, <제2종> 한의사, <제3종> 보건원 조산원 간호원 등 모두 3종으로 업종을 구분해 규정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료업자의 면허에 관한 사항과 의료기관의 개설에 관한 사항, 의료업자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하고 또 종전의 접골사, 침사, 구사, 안마사 등을 ‘의료유사업자’라 지칭했고 자격인정 등 구체적인 사항을 주무부령에 위임하는 등 새로운 법령으로서의 모습도 갖추었다.

국민의료법의 제정·공포 이후 12월 25일에는 국민의료법 시행 세칙이 보건부령 제11호로 공포됐으며 이어 1952년 1월 15일에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국가시험령. 30일에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시험 규정이 확정됐다.

한편 국민의료법은 제53조에 각종 의료업자들의 단체 설립을 규정, 법령의 공포와 함께 의료단체의 설립도 속속 진행됐다.

한의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한의사들의 대표단체로서 학술발전, 한의사의 자질향상, 국민보건 향상 등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한의사들은 대표단체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1952년 보건부 장관의 지령 제378호로 한의사회의 설립을 촉구하는 공문이 전달되면서 국민의료법에 한의사 제도를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한의계 인사들과 부산지역 한의사 등이 주축으로 진행된 한의사회의 설립 준비작업은 급물살을 타게 되고 마침내 대한한의사협회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 후배 한의사들은 현재의 한의사 제도와 대한한의사협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이들 선배 한의사들의 개인의 이익과 대가를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한의학과 한의사의 미래를 위한 노력에 기인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최근 한약제제 한정 의약분업과 첩약건보 논의와 관련, 집행진 등 일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시행하려는 것이라며 회원들이 반발하고 있다. ‘개인의 손해를 무릅쓰면서까지 한의학과 한의사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투신하셨던 작고하신 선배 한의사들이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의학의 본류를 잃게 하는 작금의 제도변화 시도를 보시면 과연 어떤 느낌을 가지실까? 하는 생각을 하면 후배 한의사로서 죄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심정이다.

한편 국민의료법 제정을 위해 분투했던 선배 한의사분들은 훗날 설립된 대한한의사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5인동지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이우룡 선생이 대한한의사협회 초대와 2대 회장을 역임한데 이어 서울에서 피난 내려가 함께 활동했던 박성수 선생이 3대와 4대, 배원식 선생이 8대와 9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의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계속)

 

이종안 원장 / 배원식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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