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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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위한 변명
  • 승인 2003.03.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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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 著 푸른역사 刊

나만을 근심하는가? 천하를 근심하라!

우리 나라 역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혁명가가 있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그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백성(百姓)의 입장에서 고려말의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새로운 시대, 조선(朝鮮)을 연 혁명가이다.
개혁이 아닌 혁명만이 백성을 진정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왕조의 교체에 머물지 않고, 정치권의 새로운 세대교체(世代交替)와 사상, 생활사의 큰 물줄기를 돌려놓은 것이다.

세종(世宗) 때의 명신 신숙주는 정도전에 대해 "개국 초기에 실시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찬정한 것으로서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태종(太宗)의 입장에서 쓰여졌다고도 볼 수 있는 '태조실록'도 개국 초기의 그의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힘쓰지 않은 것이 없어서 결국 대업(大業)을 이루게 된 만큼 정말 으뜸가는 공신이었다"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정도전은 원나라에 유학한 거유(巨儒) 이색에게서 새로운 학문인 유교성리학(儒敎性理學)을 배웠다. 당시 이색의 문하는 정몽주, 이숭인, 권근, 이존오, 김구용, 윤소종, 김제안 등이 있었는데, 실로 개혁파의 산실 그 자체였다. 나아가 이들은 성균관에 진출하여 성균관으로부터 많은 실력 있는 유생(儒生)들을 배출시키는 산파를 훌륭히 해냈다.

그들이 전파한 성리학은 고려말의 적폐를 타파할 새로운 이념을 갈구하는 지식인에게 자기수양(自己修養)과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겸한 진보적 이념이었다. 더불어 정치를 도덕사회(道德社會)의 실현(實現)으로 여기는 성리학은 지식인들에게 사회참여의 명분과 동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선비들의 정치참여는 현실을 개혁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는 모범자로서의 의무가 되었다.

물론 이들의 업적은 더 많은 파급효과를 낳는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개혁성향 선비의 배출은 원명의 교체기의 외교적 상황, 고려 귀족들의 부패, 불교의 폐단, 조정을 떠난 백성의 마음 등 이른바 불합리의 시대적 요청과 맞물리게 된다. 정도전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시대가 만든 영웅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역성혁명의 모반가이자 유교적 덕목을 실천한 합리주의자, 선비이자 냉혹한 정략가, 유학연구자, 진법까지 펴낸 군사지휘자, 주변 강국들의 힘의 공백을 이용해 요동수복을 계획하고 준비한 국제전략가, 수학, 의학, 불교 등에 두루 밝은 학식, 심지어 악기제작도 스스로 하였다.

또 조선의 헌법전 초안인 '朝鮮經國典'을 완성하고 후에 그 보완으로 '경제문감'을 저술했는데 이는 '경국대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지방수령론을 정리한 '감사요약'을 완성하고, 정총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오행진출기도'와 '강무도'라는 병서를 만들어 군대조련에 사용했는데 세종 때 변계량은 조선의 진법서중 정도전의 진법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을 정도이며, '문덕곡', '몽금척', '납씨곡', '정동방곡' 등의 악사를 지어 궁중음악의 기틀을 잡았고, '심난기', '기난심', '이유심기' 등의 철학논문을 썼으며 말년에는 동양 最高의 불교 비판서라 할 '불씨잡변' 등 많은 저술활동을 했다.

이는 모두 조선이라는 나라의 틀을 잡고 혼을 불어넣으며 백성을 배불리하고 편하게 함에 진력을 다했다. 조선의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경복궁, 태평로, 종로 등의 도시 기본설계에 직접 관장하여 설계도를 그렸으며 동.서대문을 잇는 운종가와 남대문거리가 만나는 곳에 현재 우리가 보는 종각보다는 훨씬 큰 동서 5칸 남북 4칸의 2층 누각으로 한양의 상징물을 건축했다. 또한 그가 지은 유교정신의 이상인 인의예지의 덕목을 결부시킨 4대문(숙청문, 흥인지문, 숭례문, 창의문)과 4소문의 이름, 근정전, 강녕전 등 궁궐 건물이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정치철학을 담은 인창, 의통, 광화, 창선, 안국, 호현 등 서울의 동네이름까지 우리가 낯설지 않게 하는 그의 높은 안목이다. 과연 조선건국의 주인공은 정도전이고 태조는 조연이었다 할 것이다. 후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개국 1등공신이며 재상(宰相)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탁류(濁流)에는 발끝조차 담그지 않았다. 정적 이방원의 손에 죽임을 당할 때도 죄목에 여자 관계, 돈 관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그만큼 자기자신에 철저했던 것이다. 당시 정도전의 선배이자 동지이고 개혁노선에서는 정적이었던 정몽주는 "삼봉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안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조선의 왕들 중에 정도전을 좋아한 왕은 영조와 정조 딱 두 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개혁정치를 실행했다는데 있으며 삼봉의 개혁적이고 민본적이며 실천적인 사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현직기자인 작가 조유식은 삼봉의 사료가 조선 500년간 역적으로 몰려서 매우 부족한 것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빈약한 사료에도 뛰어난 취재력과 기자 특유의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가 정도전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흔히들 정치가와 정치집단의 존재목적은 집권에 있다고 한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정도전은 집권에는 성공했으나 수성에 실패하고 목숨까지 잃었으니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집권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를 그 결과만으로 정당화할 수 없듯이 실패한 혁명이라고 너무 박대해서도 안 된다. 정치가의 영광은 민(民)을 위해 헌신(獻身)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대원군이 경복궁의 설계의 공으로 복권시킬 때까지 역적으로 남은 이유가 최고의 도덕성을 가진 선비들에 의한 왕의 잘못도 바로잡는 정군(正君)이라는 강력한 도덕정치와 노비의 해방, 오늘날의 토지의 공개념인 국유화 및 그를 농민에 고루 분배하는 토지개혁정책 등에서 전제군주와 귀족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요동의 고토 회복 추진은 명나라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국제적인 알력을 낳게되고 이것도 한 요인이 되었으리라.

필부의 죽음은 역사의 관심 밖이지만, 말끝마다 의(義)를 앞세웠던 사대부(士大夫)의 최후는 역사의 준엄한 평가의 대상이다. 필부와 사대부의 차이는 나만을 근심하는가, 천하(天下)를 근심하는가에 있다. 고려말 3은의 한사람으로 조선 개국을 끝내 반대했던 목은 이색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벼슬에 나가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어떤 일을 당해서도 회피할 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도 우리 정도전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지금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바이다."

박근도(상계 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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