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9] 芝山 朴仁圭 선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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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9] 芝山 朴仁圭 선생(上)
  • 승인 2003.04.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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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香을 나누는 것” 후학 양성 주력
동의보감 낡을 정도로 탐독, 한의학 매진

사진설명-1997년 학회 공개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지산 선생.

‘생긴 대로 병이 온다’는 ‘형상의학’이라는 학문을 꽃 피운 지산 박인규 선생은 ‘가르침은 향을 나누는 것’이라는 평소 뜻처럼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열과 성의를 다하며 2000년 1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한의학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선생의 이런 삶을 증명해 주듯 대한형상의학회(회장 정행규)는 그가 영면한 이후 더욱더 활발한 활동으로 향학열을 불태우며 지산 선생의 뒤를 밟고 있다. 그의 향은 작고하기 전 15억원 상당의 재산을 학회에 쾌척함으로 한의사, 한의대 교수 및 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장학재단을 설립, 매년 전국 11개 한의대의 학생과 교수 및 한의학관련 연구원들에게 장학금·연구비를 지원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더욱 널리 깊게 퍼지고 있다.

「不問診斷學」 번역으로 한의계 입문

1927년 경남 마산에서 아버지 박완묵, 어머니 김수련 씨의 3대 독자로 태어난 박인규 선생은 처음부터 한의사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29년 금강산 입구인 강원도 고성군 장전으로 이주, 장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해 협성실업전수학교를 마치고 45년 해방 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사상범으로 몰려 원산형무소에서 13개월 간 복역하기도 했다.

47년 월남한 지산 선생은 강원도 춘천에 거주하며 춘천농대에서 학업을 닦던 중 48년 국민대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법대 3학년 재학 중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 전쟁 후 고등고시를 준비하던 선생은 인생의 항로를 바꿔 55년 서울에서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입문한다. 이 시기에 김은순 씨와 결혼을 하고 경무대와 국회 출입기자로 활약해 국회의원 등 정계관계자들과 친분을 쌓고 신임을 얻기도 했다. 기자로서 활동하던 그는 66년 한의계의 醫林잡지사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때 우연히 일본에서 나온 「不問診斷學」이란 책을 번역할 기회를 만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한의사 자격 취득

의림지 기자 생활시 한의학에 대해 관심을 갖던 지산 선생은 「不問診斷學」책 번역으로 한의학에 대해 깊은 감흥을 느끼고 한의학 공부에 점점 심취해 갔으며 대리 한의사를 두어 한의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주위 한의원으로부터 돌팔이가 한의사를 고용하고 무자격자가 멋대로 진찰한다는 비난을 받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71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월남 전 의약업에 종사했던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한의사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는 특별국가시험이 생겼다. 한의사 2인의 보증이 있으면 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지만 북에서 한의사 생활을 하지 않았던 지산 선생에게는 보증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그에게 의림지 기자시절부터 친분을 맺어 온 우성덕 원장(85·서울 성덕한의원)이 선생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어 6개월 간 여관생활을 하며 불철주야 시험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우 원장은 “당시 박 선생은 한의계에 몸담고 싶어하는 열정이 남달랐고 한의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며 “동의보감을 깊숙이 파고들어 능통했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시험 당일 주위 한의원에서 무면허 진료를 한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는데 담당형사에게 “당신은 어떤 병이 있고 어디가 아프지 않냐?”고 정확히 진단하는 것을 보고 형사가 두말없이 당신 같은 사람은 오늘 시험을 보아야 한다며 풀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험을 치른 지산 선생은 면허번호 2319번으로 한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72년 1월 종로에 세운당한의원을 개원해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하게 된다.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대한정통한의학회 창립

임상의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지산 선생은 76년 ‘大韓正統韓醫學會’를 창립해 한의사를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 현재 대한형상의학회의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청강하고자 하는 한의사 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학회도 번창해 81년에는 학회 명칭을 ‘大韓傳統韓醫學會’로 변경하고 한의원도 봉천동 관악구청 건너편 세운한의원으로 이전해 강의를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93년에는 현재의 형상의학회 회관인 관악구 봉천동으로 강의실을 확장·이전해 이후 회원들을 정기적으로 선발하기 시작해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제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된다.

지산 선생이 한의사를 대상으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밑거름은 동의보감에 대한 철저한 이해였다고 그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한의사 면허 시험 당시 동의보감을 다 외웠을 정도였던 선생은 한의사가 된 이후에도 동의보감을 늘 탐독했다고 한다. 지금도 형상의학회관에는 그의 손때 묻은 낡은 동의보감 책이 전시돼 있다.

정행규 형상의학회 회장(49·서울 홍제한의원)은 “언젠가 선생께서 동의보감을 정리한 노트를 보여주며 ‘나는 지금도 쪽지까지 적어 길에 다니면서 외울 정도인데 제자들은 너무 공부를 안 한다’며 호통을 치신 적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부인 김은순 씨(72)는 “하루 2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을 정도로 항상 책을 읽는 지독한 노력파로 한의학을 누구보다 사랑한 분이었다”며 제자들이 수시로 집으로 찾아와 지산 선생에게 직접 묻지 못하고 김 씨에게 “선생님이 무슨 책을 보셨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선생의 성품은 자상하면서도 섬세했으며 특히 시야가 넓고 탐구심이 강해 모든 사물을 보는 눈이 남달라 환자를 보는 것 이외에도 실생활을 한의학과 접목시켜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했다고 한다.
<계속>

양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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