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0] 一松 朴性洙 회장(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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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0] 一松 朴性洙 회장(上)
  • 승인 2003.04.1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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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산업·교육·제도화의 선구자

일제강점기, 곧이어 들이닥친 미군 군정. 이 급박한 시류에서 좌표를 잃은 조선의 운명과 함께 조선의 사상·문화, 그리고 한의학도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에 한의학의 제도화를 위한 염원은 뜨거워졌고, 한의학 산업화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한방제약회사가 설립됐다.

일송 박성수 회장(1897~1989)은 한의사로서 초기 한의사제도·교육 정착을 위해 활약하고 조선무약을 창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독립운동과 교육계에도 열정을 쏟는 등 대의에 따른 투철한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도전과 성과는 눈 속에 핀 매화가 더욱 귀중한 가치를 품는 것처럼, 현재 한의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방의 對日 수출 1호

1897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한 박 회장은 일찍 한의학에 뜻을 두고, 당대 한의학의 명가 이상열 선생 문하에서 한의학을 수학한 후 1919년 경성한약 전수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1920년 23세의 나이에 질병으로부터 국민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한성약업사 및 대창창업사를 창설했지만,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그 해 9월 수감돼 옥고를 치뤘다.

하지만 다시 약업에 투신, 1925년 조선무약합자회사를 설립해 솔표 우황청심원 등 대표적인 한약제제를 개발하게 된다. 솔표라는 상호는 박 회장의 아호인 一松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무약의 솔표 우황청심원이나 사향소합원 등이 1969년 일본 후생성의 수입허가를 획득하기까지 5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됐다. 일본에 약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1등국, 한국은 3등국’이라는 인식까지 깨야했기 때문이다.

수출개척이라는 목표를 향한 집념으로 일관한 결과 일본 수출의 길이 열렸고, 오히려 거래선인 일본제약공업(주)에서는 연수생을 보내오기도 했다.

조선무약은 연수 뿐 아니라 한국관광도 제공해 민간외교의 역할까지 수행했으며, 1966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로는 일본제약공업(주) 초청으로 한방의학 학술세미나에 참석, 10여 년간에 걸쳐 강연을 했다. 국내에서는 69·70·72년 3회에 걸쳐 보사부장관으로부터 수출유공표창을 받았다.

집념과 정치적 수완 빼어나

일송의 행적 중 두드러진 점은 한의사로서 한의계의 발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점 외에 특히 교육사업에 대한 업적이 상당하다.

1926년 서울미동초등학교 후원회 부회장직을 맡은 이래 양정중학교(39년) 경복중학교(45년) 서울대 의대 의예과(45년)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해방후인 1946년 서울대 의대 후원회 상무이사를 비롯해 54년 서울 용산중학교 사친회 이사장, 56년 한국외국어 대·성균관대의 후원회장을 역임했으며, 62년도엔 성균관 대학교 재단이사로 선임됐다.

한의계 교육을 위해서는 행림 재단 이사로 경희대 한의대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때 서울 신대방동에서 박한의원을 개업중이었던 박남중 씨는 당시 회고담에서 “정부의 부산 피난시절, 최초의 한의과대학 인가와 법률상 한의사제도의 정립을 위해 일송은 부산역앞 중앙동 삼성여관에 기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고 말했다.

당시 다른 대학들은 재단만 있으면 문교부에서 인가가 나오지만 한의과대학은 보건사회부장관의 승인이 떨어져야 문교부에 넘어가게 돼있었다.

하지만 한의계에는 정치인도 재력가도 없었는데 반해 세력을 형성한 양방측이 한의대 설립을 필사적으로 저지했고, 사회적으로도 서구문화의 득세로 한의에 대한 인식도 바닥에 떨어졌다.

이 속에서 일송은 오한영 보사부장관과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등 요로에 손을 써 한의대 인허를 받아내는 한편, 법제 정쪽에 관심을 쏟아 51년에 제정된 국민의료법 제2조 의료업자 종류에 ‘한의사’를 삽입, 명문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검정고시의 길도 열린 것이라며 박남중 씨는 일송의 정치적 수완과 강한 집념을 높게 평가했었다.

애국·애민에 발벗고 나서기도

어려운 시절 그는 애민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51년 4월경은 부산 방면으로 피난 내려갔던 많은 장정들이 대전을 거쳐 경기도 서울 방변으로 귀향길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헐벗고 병든 사람이 지천이던 그때, 일송은 부산에 있는 정부 각 부처와 합심해서 온양에 국립구호병원을 설립, 인명구제에 나섰다.

쌀과 약을 준비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부산과 온양을 오르내렸으며, 53년 10월엔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계속>

오진아 기자


조선무약합자회사는…

1925년 일송 박성수 회장이 자본금 1천4백만원을 가지고 서울 충정로에서 직원 3명으로 창립해, 현재 250여명 직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첫 제품으로 우황청심원을 발매했으나 6.25때 충정로의 공장이 소실되는 바람에 중단됐다가 57년 영등포구(현 동작구) 본동에 새로운 공장을 지으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68년 국내 처음으로 솔표 우황청심원을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대한민국 완제의약품 수출 1호라는 기록을 남겼다.

일본이 수입하고 있는 타국의 우황청심원은 건강식품으로 들어가지만 솔표 우황청심원은 의약품허가를 획득했고, 미주·동남아지역에도 수출됐다.

회사 대표가 85년 일송의 2세인 박대규(약학박사) 사장으로 바뀌고, 86·88서울올림픽 공식지정 업체로 선정돼기도 했다. 자사 매출의 총규모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우황청심원 외에 쌍화탕, 위청수 등의 제품이 있다.

조선무약은 70년 가까이 우황청심원시장의 선두주자로 군림해, 95년 제약기업 300업체 중 12위를 기록했지만 80년대 후반부터 후발업체의 추격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최근 박 대표이사는 경영 악화로 2001년 부도가 난 이후, 작년 7월 화의에 들어가, 경영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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