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42) | 조선중기의학 변화의 중심, 「의림촬요」와 「동의보감」②
상태바
Story & History(42) | 조선중기의학 변화의 중심, 「의림촬요」와 「동의보감」②
  • 승인 2011.01.13 13: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웅석

차웅석

contributor@http://


중국발 트렌드에 적절하게 보여준 역사적 행동

조선중기의 의학계를 대표하는 의서, 「의림촬요」와 「동의보감」은 각각 양예수와 허준의 대표작이다. 이 두 사람의 위대한 노력에 의해서만 이 의서들이 완성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의학역사의 많은 질문들에 대답해야 한다.
왜 이 두 사람인가? 다른 사람은 왜 아닐까? 왜 하필 조선중기인가? 왜 같은 내의원에서 서로 다른 책을 썼을까?
필자의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이 책들이 두 사람의 대표작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조선 의학계의 두 리더 그룹의 대표작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내의원의 의사들은 대개 두 부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학식 있는 양반 자제를 중심으로 ‘의학서연구관’의 성격인 ‘의서습독관’에서 출발하여 우선 의학서의 내용을 숙지하고 의료현장에서 실제 치료기술을 익혀간 그룹들과 애초 항간에서 치료기술로 이름이 알려져 궁중의사로 발탁된 뒤 고급의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해 간 현장출신의 그룹들이다.
양예수는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허준은 후자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두 그룹의 긍정적 상호작용은 조선초기 정책 입안이 일관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조력했을 뿐 아니라 조선중기 중국의학의 새로운 트렌드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학식에 기반한 그룹들은 새로 나온 중국의서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을 했을 것이고, 임상에 기반한 그룹들은 그렇게 재구성된 의학체계가 이론뿐 아니라 실제 임상에서도 과연 기존의 임상수준을 능가할 만큼의 위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는 검증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의방유취」라는 국가의료DB도 구축하였고, 자국산약재 및 수입약재의 수급을 위한 장치들도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마련해 왔지만, 그래서 더 이상의 큰 이슈는 없는 듯 해보였지만, 조선중기의 의학계는 1500년대 중국발 트렌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예수와 허준은 이 트렌드에 직면한 당시 조선의학계의 중심에 있었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우리가 조선중기 「의림촬요」와 「동의보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두 사람의 개인적인 위대함이 아니라, 적절한 역사적 시기에 적절하게 보여준 역사적 행동 때문이다.
양예수(1530-1600)는 선조 때에 어의를 지냈으며, 고려 때 귀화한 중국인 梁起의 9대손이며, 원래의 고향을 따라 ‘弘農老人’이라고 불리웠고, 宗系辨誣와 관련한 사신을 따라 북경에 다녀왔으며, 내의원 의사 중에서는 대표적인 중국통에 속했으며, 학식을 기반으로 의학을 시작한 인물이며 당대의 명문집안 출신이다.[김홍균, 의림촬요의 의사학적 연구]
이에 비해 허준(1537-1615)은 상대적으로 한미한 집안의 서자출신이며, 도제식으로 의학을 배웠으며, 후에 유능한 치료기술로 이름이 나서 내의원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이 드라마나 소설에서처럼 서로 다른 출신 배경으로 인해 반목하고 갈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중국의학에 대한 착실한 수업을 받은 적이 없고, 오직 임상적 기술연마를 통해 이름이 알려진 허준이 짧은 시간동안 그 많은 중국과 한국의 의학서를 섭렵해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는 점은, 이 두 사람 혹은 이 두 사람이 대표하는 조선 의학계의 두 그룹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차웅석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