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43) | 조선중기의학 변화의 중심, 「의림촬요」와 「동의보감」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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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43) | 조선중기의학 변화의 중심, 「의림촬요」와 「동의보감」③
  • 승인 2011.01.2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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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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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촬요」, 중국의학을 조선화시키기 위한 고심 역력

사마씨가 세운 진나라가 멸망한 뒤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581-618년)는 여러 국가정비사업을 실시하였다. 의학에서도 巢元方이라는 관리를 시켜 지금의 ‘국가표준질병분류집’에 해당하는 「소씨제병원후론」(610년)을 만들게 하는데, 여기에 실린 병증은 1739종이다. 북송(960-1126)이 개국하면서 만든 「태평성혜방」(992년)에는 1670종의 병증에 16834개의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후 명나라가 개국하면서 만든 관찬의서 「보제방」에는 병증분류가 2천종이 넘고 처방도 6만개를 웃돌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대략 100년이 지나 당대의학계의 베스트셀러였을 뿐 아니라 광범위한 국외의 독자층까지 형성해 갔던 「의학정전」(1515년)은 단 71개의 병증분류에 928개의 처방만을 수록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의 다양한 루트를 통해 넘쳐나는 정보홍수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도 직감하는 일이겠지만, 정보의 절대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필요한 정보를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가 훨씬 중요해진다.

두통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두통문」에 있는 몇 백 개의 처방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 두통은 왜 생겼는지, 대대로 유명하신 분들은 어떻게 치료했는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고,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이용되고 효과있는 처방 몇개를 골라주는 것이 필요하다.

「의학정전」은 그러한 로직을 설명한 책이다. 이러한 중국의학의 새로운 변화는 직접적으로 조선 내의원의 의사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조선왕조실록의 중종대 중반이후의 의사들은 단순한 증상에 경험치료기술을 대응해 가는 수준이 아닌, 증후의 변화를 분석하고 맥상의 변화를 관찰하며 나름의 논리에 입각해서 체계적으로 치료해가는 형태로 변해간다.[김정선,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치료를 통해 본 의학의 변천] 중국의서를 통해 의학기술운용의 질적인 변화를 경험해간 내의원 중심의 의사들은 조선의학도 이러한 체제에 입각해서 재구성해야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의서가 「의림촬요」〈사진〉이다.

현존하는 「의림촬요」는 여러 종의 권수가 다른 판본들이 존재하며, 저자와 교정자도 일관적이지 않다. 정경선, 양예수, 이락, 이희헌 등의 이름이 교대로 등장하지만, 초기 판본부터 일관되게 등장하는 인물이며 학계에서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은 양예수(1530-1600)이다.

「의림촬요」에는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는 물론, 「의학정전」을 비롯해서 「단계심법부여」, 「명의잡저」 「의학입문」 「만병회춘」 「제음강목」등 기존의 한국의서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의서들이 대거 인용된다.

1589년 즈음에 처음 간행되는 「의림촬요」는 왕실 내 최고 위치에 있던 의학자가 중국의학을 조선화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얼마 후에 「동의보감」이 간행됨으로써, 이 책은 과도기의 것이 되고 말았지만, 전임자였던 양예수와 후임으로 내의원의 수석의사가 된 허준이 내의원에서 오래도록 같이하는 동안 양예수 등의 내의원 의사들이 「의림촬요」를 정리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허준이 착실하게 이어받았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김홍균, 의림촬요의 의사학적 연구]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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