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44) | 조선중기의학 변화의 중심, 「의림촬요」와 「동의보감」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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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44) | 조선중기의학 변화의 중심, 「의림촬요」와 「동의보감」④
  • 승인 2011.02.1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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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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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면밀한 「동의보감」의 역사

2009년 7월 31일 카리브해에 위치한 영연방국가 바베이도스의 수도 브리지타운에서 열린 제9차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국제자문위원회는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등재를 결정하였다.

한의학에서 「동의보감」이 갖는 위상은 말로 다 전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한의사가 고소득 직종이 될 수 있는 것, 한의과대학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시킬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한국인들의 저변에 깔린 전통의학에 대한 관심과 우호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관심과 우호적 태도를 가능하게 했던, 우수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치료효과의 저변에는 「동의보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선시대 한국의학사에 대한 기조는 아주 간단하다. 조선초기의 의학역사가 「동의보감」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면, 조선후기의 역사는 「동의보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용하느냐의 역사이다.

고려말에서부터 시작된 향약연구가 민간에서 꾸준히 축적되고 진화되어 16세기 후반 허준이라는 명의를 탄생시켰고, 왕실 내의원의 의사들은 중국의 고급의학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압축해오다가 궁극에는 양예수를 통해 「의림촬요」라는 시험판을 만들어 보게 하고 거기서 생긴 당대 중국의학에 대한 노하우를 허준에게 전수하게 해주었다.

왕자시절 허준에게 천연두를 치료받은 이후부터 줄곧 허준의 편이 되어주었으며, 후에 왕이 되었을 때 허준이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완성할 때까지 금전적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광해군도 빠질 수 없는 조력자이다.

그리고 1613년 「동의보감」의 간행을 통해 조선전기 한국의학계의 두 대표그룹들[왕실내의원 중심의 고급의학연구그룹, 민간중심의 실용임상그룹]은 하나의 접점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의 간행이후 200년이 지난 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왕실의 최고의사 강명길(「제중신편」)과 평안도 시골의사 이경화(「광제비급」)가 간행한 책이 공교롭게도 「동의보감」베이스였다는 것은 조선의학계가 꾸준히 「동의보감」을 내재화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김남일,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조선후기 선비집안의 서재에서 「동의보감」은 반드시 있어야 할 책이었으며, 구한말에 간행된 한의학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면서 스테디셀러인 「방약합편」도 「동의보감」에서 골라낸 엑기스를 모아놓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양의학이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전통의학의 가치부흥을 위해 애쓴 많은 의학자들이 근간으로 삼은 것도 「동의보감」이었으며, 해방이후 대학에서 근대 한의학교육을 시작하면서 임상 각과의 교육교재로 쓴 것도 「동의보감」이었다.

고려말의 향약개발에서부터 시작해서 최근 「동의보감」의 유네스코기록문화유산등재까지, 마치 ‘동의보감귀신’이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추진해서 만들고, 또 그것이 계속 가치부여를 받아 이어가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가 보여준 「동의보감」과 관련된 모든 과정은 주도면밀했다. 최근에는 동의보감기념사업단에서 「동의보감」 영역판을 준비하고 있다. 또 다른 도약이 기대된다.

 차웅석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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