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46) | 조선의 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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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46) | 조선의 법의학
  • 승인 2011.02.2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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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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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전통의학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키워드가 ‘허준’과 「동의보감」이라면 중국사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키워드는 ‘이시진’과 「본초강목」이다.

물론 이시진과 「본초강목」이 의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실제 중국사회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51년 비엔나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협의회(WPC)에서 이시진이 ‘세계의 명인’에 선정된 이후이다.

「본초강목」은 1578년 간행된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중국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유럽학계에서 유명해진 것인데, 사실 「본초강목」보다 더 유럽사회에 많이 알려진 것은 「洗寃集錄」(1247), 「無寃錄」(1308) 같은 법의학 전문서들이다.[梁永宣, 北京中國醫藥大學敎授]. 죽은 사람들의 사인을 밝히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질병치료 이상으로 복잡한 사회·문화·정치적 관계가 얽혀있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원집록」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수준의 대표적인 법의학전문서이지만, 이후 「평원록」 「세원법록」 「무원록」 등 업그레이드버전이 연이어 출간되면서 이 책 자체의 수명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후속판 중에서 조선과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책은 「무원록」이다. 이 책은 간행이후 바로 당시 고려정부에 전해졌으며, 세종20년[1438]에는 주석을 달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수정·보완한 「신주무원록」을 간행하였다. 이른바 조선판 법의학서가 간행된 것이다.

이후 조선은 1748년의 「증수무원록」, 정조대의 「증수무원록대전」, 「증수무원록언해」를 통해 지속적으로 내용을 수정보완하면서 국가 법질서 확립의 중요한 전거로 활용하였다.[김호, 조선시대 법의학]

조선시대 검시의 과정은 다소 엄격했다. 기본적으로 두 번을 하게 돼 있는데, 첫 번째를 ‘초검’, 두 번째는 ‘복검’이라고 한다.

초검은 해당 관할지역 수령이 담당하고 복검은 일반적으로 인근지역 수령이 담당하였다. 복검을 실시할 때는 초검 당시의 기록을 절대로 열람할 수 없게 돼 있었고, 물론 초검관과 복검관이 서로 내통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두 번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는 추가 검험이 실시되고, 이때는 중앙정부의 형조에서 관원이 파견되거나, 혹은 해당지역 관찰사가 임명한 특별검시관이 파견되었다.[이연희, 검요에 대한 의사학적 고찰]

부패방지 처리도 쉽지 않았던 시절에 이토록 복잡하고 엄격한 절차를 법에 명시해 둘 정도면, 조선사회의 법집행도 그다지 녹록치 않았던 듯한데, 그만큼 조선사회에서 시체검험과 관련된 사건사고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1790년 황해도 수안군에서 발생한 2건의 살인사건의 전모가 근처 곡산부사로 재직하던 정약용(1762∼1836)의 복검에 의해, 복수극이 아닌, 제3자가 개입된 복수극을 가장한 살인사건으로 밝혀진 일도 있었다.[유승희, 미궁에 빠진 조선]

 “시신은 자신의 몸에 반드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기는 법이다” 드라마 ‘싸인’의 자문을 맡은 국과수 최영식 수석법의관의 말이다. 죽은 사람의 몸에 남긴 이야기를 읽는 것. 법의학의 세계가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이며,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죽은 사람의 사연을 밝히는 것도 의학문화 속의 중요한 테마이다.

차웅석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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