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51) |「승정원일기」 속의 의학기록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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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51) |「승정원일기」 속의 의학기록 ⑤
  • 승인 2011.04.1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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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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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에서 찾아야 할 것들

한국 근현대의 유명한 한의학자 고 晴崗 金永勳[1882-1974] 선생의 처방집인 「청강의감」(김영훈 선생의 수제자인 고 이종형 선생이 펴낸 유고집)에는 加味普正散(원래 명칭은 普救正氣散), 祛暑和中湯, 枳梗化痰煎과 같은 「동의보감」이나 「방약합편」에서 볼 수 없는 생소한 이름을 가진 처방들이 많다.

물론 가미보정산은 香葛湯의 변방이며 거서화중탕은 六和湯을 가감해서 만든 처방들이기 때문에 구성내용을 보자면 그다지 생소할 것도 없지만, 처방 이름만으로 보자면 김영훈 선생만의 독특한 처방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김영훈 선생이 당시 서울의 최고의 중심지인 낙원동에서 최신식 2층 양옥건물을 짓고 ‘普春醫院’ 간판을 내건 것은 1914년 4월, 만32세 되던 해이다. 그리고 개업 초기부터 서울의 재력가들과 고관대작들을 환자로 받기 시작하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사회가 연로하고 경험 많은 의사를 선호하는 추세인 것에 비추어본다면 당시의 김영훈 선생의 경우는 매우 파격적인 케이스이다. 「청강의감」에 나와 있는 처방들은 선생이 개업 초기부터 서울의 유지들에게 과감하게 쓰기 시작했던 처방들이다.

강화도 보문사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썼다고 하는 의서 「수세현서」(1904년)에도 전혀 보이지 않는 처방들이 불과 10년 사이에 수십 개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10년은 동제의학교 교수 발령, 동제의학교 폐교, 팔가일지회 활동, 한일합방, 사설 강습소 개설, 의생면허취득, 전국의생대회준비 등 한의학 부흥을 위한 사회활동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절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공사다망했던 그가 처방을 만들고 새로 이름까지 붙일 정도의 공을 쌓을 겨를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30대 초반의 젊은 한의사에게 서울 시내의 유력자들이 가족친지 심지어는 집에서 일하는 식솔들까지 데려와서 치료를 받게 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처방들을 어디서 구했을까?

이 처방들에 대한 유래는 아직 연구 중이다. 그러나 최근 「승정원일기」에서 하나의 단서를 찾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소장 중인 김영훈 선생의 진료기록(1914년부터 1974년까지의 진료부 약 12만장)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처방이 ‘보구정기산’과 ‘거서화중탕’인데, ‘거서화중탕’이라는 명칭은 한·중·일 의학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유일하게 「승정원일기」 기사에 등장한다. 정조19년(1795년) 5월 22일 기사에 처음 등장하며, 정조는 그해 여름 계속 이 처방을 복용하였다.

「승정원일기」의 의학기록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 있다. “왕실이라면 조선의 최고의 의사들이 모여 있던 곳 아닌가요?” 그럴 것이다. 조선최고의 명의들이 모여서 조선의 최고 권력자를 위해서 최고의 치료기술을 만들어가던 곳이다.

거서화중탕의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성처방을 써보고 고치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조합을 만들고 그것을 정착시켜 새로운 이름까지도 만들어갔던 곳이다. 「상한론」의 반표반리증에 쓴다고 하는 소시호탕을 조선왕실에서는 감기 후에 여열이 사라지지 않을 때 어김없이 투약했다. 새로운 적응증을 찾아간 예이다. 우리는 「승정원일기」에서 찾아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다.

 차웅석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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