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55) | 이병모와 이경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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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55) | 이병모와 이경화 (2)
  • 승인 2011.05.1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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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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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기존의 인물사전 등에서 숙종 때 송시열의 문인 이경화[1629-1706]와 혼동하여 기재되어 왔는데 최근 한 연구자에 의해 「광제비급」의 저자 이경화는 본관이 김포이며, 1721년에 평안도 성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774년에 식년 생원시에 3등급제한 사람으로 밝혀졌다.[오재근, 「본초강목」이 「광제비급」에 미친 영향분석]

이경화는 「광제비급」의 저자 이전부터 의학으로 이름이 제법 알려진 사람이었다. 尹鳳朝[1680-1761, 호 圃巖]의 「포암집」에는 그가 이경화를 위해 지어주었다고 하는 싯귀[戱贈成都李醫景華. 後神方欲問誰, 成都隱者隱於醫, 可能試手除吾疾, 吾疾平生在白癡]가 실려 있고 1782년[정조6년]에는 이미 의약동참의 자격으로 정조의 진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승정원일기 정조6년 5월 10일]

평안도 성천 출신의 이경화가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를 만난 것은 1790년 「광제비급」이 간행된 그 해 3월이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 이 책이 간행되기 때문에 이병모가 관내 배포용 의료지침서 제작을 위해서 특별히 초빙해서 만난 것이다. 「광제비급」의 간행 이후 이병모는 중앙 정계에 복귀한 자세한 이력이 알려져 있지만, 저자인 이경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 이경화의 행적에 대해서 흥미로운 단서가 있다.

작고한 한국의 대표시인 이은상(1903-1982)은 저서 「노산문선」에서, 오래된 전래 민요를 소개하면서 순조 때에 “成川의 李景華야 네 날 살려라’란 동요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설명에 ‘이경화란 성천의 명의가 있어 여러 가지 사실로 혹세무민한다고 혐의를 받아 사형을 당하였던 바, 얼마 후에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가 병석에 눕자, 천하의 명의를 다 불러들여도 쾌차하지 못하고, 마침내 순조 30년(1830년)에 세자가 죽고 말았으니, 이 동요는 무고한 명의를 혹세무민하는 자로 몰아 극형에 처한 그 사회의 비리를 풍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설명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이 동요가 구전되어 남아있다는 것 자체는 이경화는 당대에 널리 알려진 명의였으며, 그리고 그 명의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억울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경화의 「광제비급」은 「동의보감」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 외에 한국의학사에 또 다른 의미를 준다. 그것은 「본초강목」(1596년 南京에서 간행)과의 관계이다. 「동의보감」 간행 이후 한국 의학계에 알려진 이 책은 52권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학계에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조선의학계는 이 책의 현실응용 가능성을 꾸준히 발굴해갔다.

「광제비급」에 실린 단방본초에 대한 내용은 거의가 「본초강목」의 내용이다. 요약하면 「본초강목」 중에서 조선의 현실에 맞는 약재와 적응범위에 대해서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통은 고급 복합처방을 구사해가는 고급 의학계와는 별도로 한국의 민간요법의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가게 된다. 그 중요한 길목에 「광제비급」은 위치하고 있다.

 차웅석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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