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4주년 기념특집] 한약분쟁! 그후 10년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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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4주년 기념특집] 한약분쟁! 그후 10년②
  • 승인 2003.07.1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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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 전담부서 신설이 최대 성과
치료의학에 관심, 한의학의 객관화에도 노력 경주
100처방 단속 규정 사문화, 한의약법 제정과제 남겨


□ 싣는 순서 □
① 한약분쟁의 배경
② 한약분쟁의 성과와 한계
③ 바람직한 계승을 위하여


② 성과와 한계

한약분쟁은 시행규칙 한 줄이 삭제됨으로써 발단이 되었지만 진행과정에서 한의계는 약사회의 탐욕보다는 한의학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정부을 규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렇게 해서 싸우기를 수년. 결과적으로 한의학을 둘러싼 환경은 이전의 상황과 많이 달라졌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발전적이든 퇴보적이든 한약분쟁을 기점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 한약취급 자격의 제한

가장 큰 변화는 뭐니뭐니해도 한약취급의 기준이 정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전에는 아무런 능력과 자격 없이도 한약를 취급할 수 있었으나 분쟁을 겪으면서부터는 형식적이나마 검증을 거쳐 한약을 취급하도록 법제화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약조제약사와 한약사제도다. 한약조제약사제도는 한약사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약사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서 최소한의 자격을 확인하는 시험-이마저도 엉터리시험이라는 지적이 많다-을 거쳐 한약취급자격을 인정하는 과도적 제도다.

한약조제약사가 약사의 한약취급자격을 편법적으로 부여한 조치라면 공식적인 한약취급자격을 획득한 직능은 한약사였다.

비록 3개 대학에서 소수를 배출하는 직능이지만 한약을 취급하는 전문직능이라는 점에서 한약조제약사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두 가지 자격의 신설로 아무나 취급할 수 있게 되어 있던 한약조제권이 제한될 수 있게 된 반면 한약사제도의 신설은 장기적으로 의약분업을 하기 위한 복지부의 의도가 내재된 조치여서 한의계는 장기적으로 의약분업의 테두리내에 들어가게 됐다. 한의사의 분업파트너는 실질적으로 한약조제약사가 될 개연성이 높다.

여기에다 분쟁과정에서 발표된 약대 6년제 약속은 한약사제도의 존속에 중대 변수가 될 수 있으며, 약사법상 한약제제가 일반의약품으로 규정되어 양의사 처방, 양약사 조제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있는 현실은 미래한의학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100처방 단속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제한규정이 사문화된 상태다. 이는 한약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 국가의료로의 편입 시작

분쟁 이전 정부정책의 기조는 약사법과 의료법이 상징하고 있듯이 양의약 정책일변도였으며 양의약에 편향된 공무원들도 의료의 흐름이 전염성질환에서 만성퇴행성질환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각종 지표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나서야 공무원들은 국민이 한의학을 애용하고 있다는 현실과 한의학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너무 미흡하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과장급 한방의료담당관을 설치한 데 이어 96년에는 국장급 한방정책관실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공중보건한의사제도가 도입되었으며, 국립의료원내에 한방진료부를 설치해 한의학의 제도권 편입을 가속화시켰다.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 한의학연구원의 설치로 이어졌다.

영세한 연구인력과 예산, 한의학 임상연구센터 부재 등 실질적 연구 기반이 미흡하지만 2004년말 완공을 목표로 대전에 신청사를 신축하는 등 희망이 움트고 있다.

한의학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도 하나둘 마련되기 시작했다. 약사법이 개정됨은 물론 마약법, 병역법이 개정되어 한의사의 참여폭이 늘어났다. 최근에는 알맹이가 빠지긴 했지만 한의약육성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한의약법 제정과 한방정책관실의 집행조직으로의 전환에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내 한의학 행정·연구부서가 생김으로써 한의학 관련 조사, 연구, 정책입안, 법률제정에 이르기까지 한결 체계적이고 수월하게 관리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독립한의약법과 한방식약청, 국립 한의대가 설치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한의학의 실질적 국가관리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존재한다.

◆ 한의학연구 지원 가속화

한의사와 약사간의 분쟁은 즉각 전 보건의료계와 국민의 관심사로 부각됐다. ‘약사가 한약을 지어도 되나’ 하는 의문부터 시작해서 한의사가 너무 소외됐다는 동정론이 일었고 그러다가 서서히 한의학의 가치를 다시 보게 됐다.

한의학은 우리 고유의 문화를 갖고 생활 속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으며, 뛰어난 치료효과와 예방기능으로 양방을 보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양방에 비해 의료기관을 설치·운영하는 비용과 치료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국제경쟁력을 가진 분야라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인식은 급격하게 변화돼서 전통의학의 지적재산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데 이어 최근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시장개방 추세에 대비해 한의학의 육성이 농촌을 살릴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한약재에 대한 품질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이 분야의 연구와 지원도 한층 강화되었다. 관련 기구의 확장은 물론이고 예산을 지원하여 한의약의 치료가치를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싹텄다.

한방정책관실의 첫 번째 작품인 2010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상당한 연구비가 한의대에 지원되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는 물론이고 과기부, 정보통신부, 농림부 등의 부처에서도 한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의료관행의 변화

아무리 법과 제도가 개선됐다 하더라도 경제적 요소가 간과되었다면 이후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쟁과정에서 한방의보 수가-특히 침 수가-의 대폭적인 현실화는 침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침구 수가가 상향조정됨으로써 이전의 낮은 침수가에 의욕을 잃었던 한의사들이 보험청구를 안할래야 안할 수 없게 됐다. 자연히 한방의료기관이 대형화, 현대화, 다양화됐다. 비로소 한의학이 국민 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함께 보신의학과 귀족의학으로 치부되던 진료방식은 치료의학으로 전환됐다. 양의계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영향도 있었지만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자각한 데 따른 것이다.

국민에게 다가가는 의료가 되고자 청년한의사회 차원의 세미나 개최, 산재환자진료 등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산재보험에 적용되었다.

국제적 네트워크에 참여하려는 기운도 고조되어 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KOMSTA)이 발족됐다.

더욱이 이 시기는 한의대 졸업자가 연 700여명으로 폭증한 데 따른 내부경쟁이 심화된 시기여서 내적 자각이 더욱 고양되었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시민운동에 영향을 받아 군림하는 의료를 용납하지 않게 됐다. 국민을 대신한 시민단체는 의료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하여 조정과 압박을 병행하면서 의료의 투명성을 높여갔다.

의약산업측면에서는 소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건강식품시장이 급팽창해 한방의료기관의 전통적인 강세분야가 위축되었다.

이에 따라 한의사들은 실력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의료기관의 경쟁과 변화 앞에서 안주할 수 없게 된 한의사들은 한의학 배우기에 매달려 한의학강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게 된다. 신치료방법과 치료영역이 급격히 확대된 것도 분쟁의 영향이 컸다.

대학과 병원에서는 한의학의 연구방법론에 관심이 고조됐다. 한의학의 과학화는 반대하지만 객관화의 필요성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침술의 치료기전 연구가 활성화된 것이라든지, 기미론의 한계를 지표물질로 보완한 것, 서양의학이 발전한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일 등은 두드러진 변화였다. 학술행정의 중심축인 대한한의학회가 한의협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도 이런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건강식품과 한약제제 분야가 성장했다. 한방의료기관의 판도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전문화된 한의원과 치료능력을 보유한 한의사와 한의원이 번창한 대신 보약위주의 한의원은 퇴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의원의 경영방식도 공동개원, 프랜차이즈, 전문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약분쟁과정에서 침구사제도의 신설을 저지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도입한 한의사전문의제는 시행규정의 제정을 미뤄 있는 듯 없는 듯 하다 수련의의 법적 근거가 문제가 돼 속전속결로 시행됐으나 한의사의 분열이라는 후유증을 남겼다.

한의계의 대표단체인 한의협의 변화는 눈부셨다. 분쟁 전 10억원의 예산이 분쟁 직후 23억원으로 늘어나더니 지금은 45억원 수준으로 급팽창했다. 금명간 회관건립에 착수하게 되면 3, 4년 내에 가양동시대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 보건의료계에 미친 영향

양의계와 양약계에서는 한약분쟁을 계기로 의료는 일원화하고 약은 양약사가 맡아 종국적으로 한의사제도를 폐지하려 했다. 그러나 양의약계의 의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약사제도가 신설되었기 때문이다.

약사법을 개정하면서 의약분업 일정을 명시해 의약분업 갈등이 유발돼기도 했지만 정부입장에서는 40여년간 지지부진하던 의약분업논쟁을 마무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약사가 독점하던 수의약품의 판매권을 수의사에게도 허용하는 한편 수의대는 6년제로 전환됐다. OTC의약품도 우여곡절을 거쳐 수퍼에서 판매되게 된 것도 부수적인 변화라고 하겠다.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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