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존인물 백광현의 행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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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존인물 백광현의 행적 (3)
  • 승인 2013.10.1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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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혜

방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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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성 혜
인사랑한의원 원장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저자http://blog.daum.net/shbang98
조선 후기에 미친 영향
결국 백광현도 인간이기에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숙종 22년(1696년) 72세의 나이에 이른 백광현은 갑자기 토혈의 병을 얻게 되었다. 여러 가지 약으로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결국 숙종 23년(1697년) 2월 9일에 사망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외과의사였던 백광현의 사망 이후에 그의 의술은 사장되어 버리고 말았을까? 그렇지 않다. 살아생전 백광현이 직접 쓴 의서는 없다. 비록 그가 의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는 사람을 남겼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후손들이 그의 의술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사망 후에도 그의 의술은 사장되지 않고 조선 후기에 여전히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백광현의 맏아들인 백흥령(白興??)은 숙종 10년 김석주의 추천으로 금위영(禁衛營) 침의(鍼醫)로 뽑혔다. 또한 숙종 26년과 27년에 인현왕후가 종기를 앓고 있을 때에 입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둘째아들인 백흥성(白興聲)은 민간에서 의술로 이름을 떨치던 중 경종 3년에 궐로 불려가 임금의 종기 치료에 참여했으며 영조 8년 천거에 의해 내의원에 침의(鍼醫)로 발탁되었다. 이후 영조 임금과 왕비, 세자, 세자빈 등 왕실의 환후를 누차 치료하여 포상을 받았다.

백광현의 조카인 백흥전(白興銓)은 숙종 20년 내의원에 천거되었고 이후 임금과 왕비, 세자, 세자빈의 환후를 치료하였다. 경종 대에 내의원으로 불려가 경종 3년 임금의 종기 치료에 참여하여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고 영조 대에도 임금의 입진에 참여하여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외에도 백광현의 여러 후손들이 영조, 정조, 순조 대에 이르기까지 의술로 이름을 떨쳐 내의원으로 천거되었다. 본래 무관의 집안이었던 임천 백씨 집안이 백광현 이후 의인의 집안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임천 백씨 집안에서 내의원 침의(鍼醫)로 활약한 사람이 백광현을 포함하여 모두 12명이다. 한 사람의 출중한 의술이 조선 후기에 맹활약한 뛰어난 의사 집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백광현의 의술이 조선 후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후대인의 평가
백광현의 사망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안타까움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백광현이 노년에 이르렀을 때 숙종 임금은 그에 대해 “지금 침의(鍼醫) 중에서 침을 놓고 종기를 터뜨리는 것에는 백광현이 으뜸이다”라고 평가했다. 백광현이 말년에 병을 얻었을 때에는 숙종은 의관들에게 “백광현이 진찰하는 바는 신의 경지에 가까워 매번 국가에 환후가 있을 때마다 신묘한 효험을 거두었다”라고도 하였다. 그만큼 숙종은 백광현의 의술을 지극히 신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이 흘러 경종 3년 임금에게 종기가 생겼을 때 내의원 의관들은 “만약 백광현이 살아 있었다면 언제 새살이 돋고 언제 살이 완전히 아물지 반드시 정확히 예측하여 알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영조 50년에 이르러서는 내의원 도제조인 원인손이 “내의원의 침의인 백문창은 선왕 대의 명의였던 백광현의 후손입니다”라고 영조에게 아뢰기도 했다. 백광현이 죽은 지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는 조선 왕실에서 명의로 기억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또 다시 세월이 흘러 21세기가 되었다. 그의 행적과 치료 사례를 기록해 두었던 「지사공유사 부경험방」은 일제에 의해 강탈되어 한동안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었다. 다행히도 국립중앙도서관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 복사본을 만들어와 보관하고 있기에 현재는 열람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한의학도 억압되고 한의학의 외과술도 단절되었다. 백광현 역시 그의 이름만 겨우 문집에 기록되어 전해질 뿐 그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한동안 단절된 상태였었다. 그러다보니 백광현의 생몰년이 미상이라는 둥, 백광현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4건이 전부라는 둥,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둥, 세간의 이러한 얘기를 접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 것이 필자의 심정이다.

현재의 시사점
지금 한의사들이 외과술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광현의 과거 행적이 아무리 찬란한들 현재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지금 우리 한의사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다. 과거를 그저 과거로 묻어버리면 정말 과거로 끝나버릴 뿐이다. 이를 현재로 끄집어내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과거가 현재에 의미를 지니게 되고 또한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된다.

백광현의 의술은 그가 살아생전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후손들에 의해 조선 후기를 지배하여왔다. 그렇다면 백광현과 그의 후손들이 행했던 의술은 현재의 한의사도 행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런 점을 잘 활용한다면 현재 한의학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마취제나 진통제와 같은 것들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소염제나 항생제 역시 이러한 예가 될 수 있다. 백광현과 그의 후손들이 외과술 전후로 시행한 여러 처치들이 이러한 마취제, 진통제, 소염제, 항생제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백광현이 사용한 약인 소독비방(消毒秘方)의 경우 유향과 몰약이 진통제의 작용을 한다. 용뇌나 사향은 소염제의 작용을 한다. 백광현의 아들인 백흥성이 사용한 황랍고(黃蠟膏)는 항생제의 작용을 한다. 외과술에 사용되는 마취제는 「동의보감」을 위시한 여러 의서에 기재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활약했던 의사들은 외과술뿐 아니라 외과술 전후로 마취, 진통, 소염, 항생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여러 약들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시행되고 있는 도침요법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는 매우 반가운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치질에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결찰요법의 경우 한의사가 진통제를 사용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양의사와 협진을 해야 했다고 알고 있다. 만약 여기에 여러 마취제나 진통제 등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다면 한의사의 영역이 더욱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백광현과 그의 후손들 그리고 조선 시대 여러 의사들의 치료 행적이 한의학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에 필요한 역사적 근거를 분명 제공해 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 과거를 그저 과거로만 묻어두지 말고 현재에 활용하여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여러 한의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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