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의 정신만 계승하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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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의 정신만 계승하면 되는가?
  • 승인 2014.04.0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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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mjmedi@http://


시평/ 김기왕
김 기 왕
부산대
한의학전문
대학원 교수
“오늘처럼 한의학의 ‘한’이 원망스런 날이 없다”,

“언제쯤 우린 ‘한의학’이란 프레임을 벗어날 수 있을지?”

요즘 인터넷의 한의사 모임에서 듣는 이야기들이다.

많은 한의사들이 그간 한의가 맡아왔던 영역만을 지키는 것을 갑갑하게 느끼는 것 같다. 이대로는 고사(枯死)를 면치 못할 것이란 위기의식도 느끼는 것 같다. 그들이 생각하는 탈출구는 의사들과 동등한 지위와 권한을 얻는 것인 듯하다. 근래에 현대의료기기 사용 권한을 두고 한의계에서 터져 나오는 갖가지 요구들은 그런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9년 전 유용상의 「허준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나왔을 때 한의계에서는 성토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지만 지금은 “허준과 동의보감을 버려야 한의계가 산다”(안종주, 민족의학신문 942호)는 이야기가 한의계 언론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껏 한의계에서 금기시되었던 이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신세대 한의사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결코 그들이 한의계의 배신자이거나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정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님을 잘 느낄 수 있다. 오히려 별 생각 없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한의계에 의미 있는 사람들이다. 변화된 상황에서 뭔가 대안을 제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들에게서 일관되게 느끼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바뀌어도 된다고 말하지만 그들도 지켜가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무얼까? 대개는 한의학의 정신, 건강과 질병에 관한 한의학의 태도, 인간을 바라보는 한의학의 시선… 이런 유(類)의 것들인 것 같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의학의 정신을 지켜가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존재 가치가 확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한의계 신문에는 몇 차례에 걸쳐 미국의 정골의학자가 참여하는 학술행사를 고지하는 광고가 실렸다. 오는 4월 6일 열린다는 이 세미나의 광고에는 “몸은 스스로 조절하고 스스로 치료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 / 몸은 하나의 정체(整體)로서, 사람은 몸과 마음과 정신의 조합으로 표현된다 / 몸은 동태적 기능단위다 / 구조와 기능은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다 (중략) - 정골의학 의사들이 따르는 신조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 한의학 이론과 상충되는 이론이 있는지요?” 이런 내용이 보인다. 광고에 등장하는 질문 그대로, 한의학의 배경을 이루는 관점들과 정골의학자들의 신조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굳이 정골의학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세계 각지의 거의 모든 전통의학체계는 정체관(整體觀, holistic view)을 견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한의학이 다른 전통의학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필자는 한의학의 가치가 한의학 고유의 인과율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증상이 언제 나타나고 어떤 증상과 함께 나타나며 어떤 치료에 반응하는지 등등에 관한 지식이 한의학의 핵심적 내용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포기하면 과학으로서의 한의학을 송두리째 내려놓는 것이다. 만약 진실로 그래야만 한다면, 즉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한의학의 정신’과 같은 미사여구는 필요 없다. 솔직하게 한계를 인정하고 현대의학에 항복 선언을 해야 한다.

‘동양의 물질 문명이 서구에 의해 굴복되었으니 동양의 정신 문화를 지켜가자’ 하는 구호가 얼마나 허구적인지, 적어도 이 글을 보는 이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가식적 구호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동아시아의 거의 유일한 과학이 한의학이다. 그러나 이제 그마저도 ‘정신’만을 계승한 채 서양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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