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왕 시평] 혈위의 정의, 이제는 바꿔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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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시평] 혈위의 정의, 이제는 바꿔야 할 때
  • 승인 2014.07.1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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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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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시평
김기왕
부산대
한의학
전문대학원 교수
혈위는 존재하는가? “진부한 질문이다”,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왜?”, “혈위는 존재를 논할 대상이 아니다” … 어쩌면 시큰둥하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한, 독자들의 다소 차가운 반응조차 예상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문제를 그대로 덮어둘 수는 없을 것 같다.

혈위가 의미를 가지려면 혈위라고 하는 체표상의 작은 구역이 다른 부분과 무언가 다른 특성이 있다는 것, 즉 소위 혈위특이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혈위특이성 탐구의 짧지 않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 혈위특이성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확인된 사실인 것 같다. 즉 소수의 혈위에서, 몇 가지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만 확인되는 특성인 듯하다.

연구 현장이나 교육 현장에서보다 임상가에서 혈위의 존재감은 더욱 미미한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정확한 취혈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한의사가 존재하지만 보다 많은 한의사에게 혈위란 보고 느끼며 만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규범으로만 주어지는 존재인 것 같다.

이렇듯 혈위란 희미한 그림자만을 드리우고 있는 존재지만 이와 동시에 여전히 꽤 무거운 부담을 이곳저곳에 지우고 있다. 일례로 어떤 시술이 한방의료행위인지 현대의학의 의료행위인지 판정하는 데는 여전히 시술이 이루어진 위치가 경혈인지 아닌지가 판단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지금도 한의대 학생들은 수많은 혈위의 정확한 위치를 암기해야만 한다.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침구학이 교육되는 모든 국가에서 이것은 학생들의 의무가 되어 있다. 참으로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런 어정쩡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혈을 포기하지 않는 데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어떤 과학이론이 폐기되는 것은 그 이론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많이 발견되어서가 아니다.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이론이 나타나야만 비로소 과거의 과학이론은 폐기된다. 현재의 침구 치료를 설명하는 데는 아직도 고전 경락경혈학설만한 것이 없다. 아직까지는 현대 과학이 고전 경락경혈학설의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없기에 혈위와 이를 둘러싼 개념들은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현대 과학이 아니면서도 침구 치료를 둘러싼 여러 현상들을 보다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정된 침구이론이 구성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체계를 만들어 내는 시도는 지금껏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고전 경락경혈학설은 2000여 년 전에 제안된 하나의 설명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 오랜 세월 이어져왔다. 전통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현재의 상황에서 최적의 설명체계가 무엇인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지금이라도 당장 시도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현대 과학이 대타로 등장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모두가 그러고 있는 사이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기형적 행태가 재생산되고 있다.

혈위가 무엇인지 재정의되어야 한다. 어떤 치료에 혈위가 필요하고 어떤 치료에 혈위가 불필요한지 구분되어야 하며 각각의 치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명확히 제시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적 지식이 불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현 상황에서 최적의 설명체계를 구성해 보는 작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금도 침구 치료를 배우고자 수많은 수업시간에 무의미한 내용의 암송을 이어가고 있을 세계 각국의 학생들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갑갑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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