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원 칼럼] 몸맘하나 멘탈클리닉(Mommamhana Mental Clinic)<22> 노년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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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원 칼럼] 몸맘하나 멘탈클리닉(Mommamhana Mental Clinic)<22> 노년은 무엇으로 사는가
  • 승인 2018.03.0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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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원

강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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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에서는 ‘노인혈쇠(老因血衰)’라고 하여 '늙는다는 것은 혈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칠규(七竅-눈, 코, 입, 귀의 7개의 구멍)가 정상적인 작용을 못하는 증상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입맛이 떨어지는 과정을 나이 듦의 외적 표현으로 보았다.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치매로 오랫동안 진료 받던 어르신이 집안 욕실 문 앞에서 넘어져 압박골절로 입원하고 며칠 되지 않아 요로감염, 폐렴 등의 내과 합병증으로 섬망증상까지 보이며 혼미한 채 몇 주가 지나갔다. 급기야 극진히 간병하던 나이든 아내도 독감에 걸려 격리되고 노부부가 각각 누워 지낸지 5일 만에 아내가 호전되어 남편의 병실을 다시 찾아갔다. 여전히 반응없이 누워있던 남편에게 알아듣든 못하든 그 동안 못 온 이유에 대해 상세히 얘기해줬단다. 그리고 손을 꼭 잡아주었는데 아무것도 알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남편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란다. 그 눈물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나 때문에 니가 힘들었구나 내가 안다.’ 할머니는 병실을 나와 한참동안 통곡을 했다고 한다. 노부부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부부의 인생여정과 맞닿아 있을 거라 어렴풋하게 생각해 보았다.

옴니버스 형식의 <길>이란 독립영화는 노년의 삶에 대해 축약적으로 이야기한다. 철길 위에서 찍은 흑백사진 속에 세 명의 고교생이 웃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길을 따라 노년의 시간 앞에 서 있다. 순애(김혜자)씨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거실에서 외국에 있는 딸아이와 통화를 한다. 딸은 자녀들 뒷바라지에 이번에도 엄마를 찾아뵐 수 없단다. 그녀는 담담히 전화를 끊는다. 식탁이 차려지고 그녀의 나이든 생일 케이크가 있고 시간이 되자 전기제품 수리기사가 도착한다. 바쁜 기사가 유일한 그녀의 생일 손님처럼 보인다. 예상치 못한 식사 권유에 어색해 하는 젊은 수리기사에게 숭늉과 케이크까지 느긋하게 권하는 그녀의 태도는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다. 이내 혼자가 된 순애씨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녀의 두꺼운 안경너머에서 ‘냉장고를 고장내는 방법’이라는 검색어가 깜빡이고 있다.

두 번째 등장한 상범(송재호)씨는 머리가 백발이다. 굼뜬 행동과 말씨와 손동작도 그렇지만 그를 더욱 신경쓰게 하는 것은 보청기다. 선명하게 때론 알 수 없는 언어들이 그가 의지하는 보청기 성능에 따라 오락가락한다. 딸의 결혼이 파경에 이르게 되고 손녀의 호적을 자신에게 올린 우여곡절로 그는 사회생활을 정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새롭게 오픈한 카페가 온통 그의 신경을 모으게 하지만 한시적으로 그를 돕고 있는 예쁘고 상냥한 카페 코디네이터에게 마음이 더 기운다. 마지막 등장인물은 수미(허진)씨다. 생의 전부로 알았던 착한 아들을 자신의 가게 앞에서 교통사고로 잃은 후 죽기로 결심하고 마지막 길을 찾아 버스에 무작정 오른다. 그 여정 위에서 만난 삶을 체념한 두 청년의 모습이 자꾸 신경쓰이고 궁금해지고 급기야 자신의 아들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들을 위로하고 다시 맘을 돌이켜 함께 일상으로 향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순애, 상범, 수미 이들은 모두 꿈 많은 청년 시절을 함께 보내고 각자의 길을 걸어 노년의 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

흔히 노인이 겪게 되는 4가지 고통 즉,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 병고(病苦)를 ‘노년의 4고(四苦)’로 규정하고, 경제적 어려움, 외로움, 역할의 상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것이 노년의 큰 고통이라고 말한다. 영화 <길>에서의 세 노인과 서두 노부부의 일상은 우리가 곧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노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이유이다.

인간의 사회적 발달단계를 주창한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생의 단계별로 성취해야할 발달과업을 제시하고 성취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 획득되는 위기를 언급하였다. 특히, 65세 이후 노년기를 성숙기(成熟期)로 사회적 발달의 마지막 단계로 보고 자아 통합(ego integrity)이 이뤄지는 시기로 보았고, 실패하게 되면 절망(despair)을 경험하는 시기로 보았다. 에릭슨은 청소년기의 자아정체성 혼란을 경험하면서 사회적 발달이론을 확립한 것처럼 말년에 치매,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90세까지 삶을 이어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생의 사회적 발달이 8단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가 또 있다는 것을 아내 조안 에릭슨(Joan Serson Erikson)의 도움으로 발표하게 된다. 그는 80세 이후를 ‘노년초월(gerotranscendence)’이라 하여 사회적 발달의 마지막 단계를 완성한 것이다. ‘제로gero’는 ‘노인’, 또는 ‘노년’을 뜻하는 그리스어이고, ‘트랜센던스transcendence’는 라틴어로 ‘초월’을 뜻하므로 합쳐서 보통 ‘노년초월’로 명명을 한다.

노년초월의 개념은 에릭슨 부부의 9단계 이론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 전에 스웨덴의 노년학자 라스 톤스탐(Lars Tornstam)의 연구공로가 크다. 그는 노년초월을 중년기 이후 노년기에 접어든 개인이 “인생의 전반적인 시각을 물질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에서보다 우주적이고 초월적인 시각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나이 들면서 어느 순간에 삶의 이치가 깨달아지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이를 ‘노년기의 득도(得道)’라는 표현을 썼다. 살아온 삶에 대해, 관계에 대해, 그리고 아픔에 대해 새롭게 깨달아지는 무엇이 있더라는 것이다. 노인들 자신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나이듦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노화 자체가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러워지고 노화를 받아들이고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게 되는 이 시기는 의례적이거나 겉체례적인 활동이나 집착은 줄어들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나 의미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 세대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되며 사회관계에서 오는 물질적인 관심이 감소하면서 고독이나 명상을 즐기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Wadensten, 2005). 즉 노년초월 이론은 기존의 성공적 노화(Successful Aging) 이론에서 다루지 못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현대 노인 복지정책에 큰 울림이 되고 있다.

 

“외로움이 좋아요/관계 없는 게 좋아요/지금 나이에 홀로여서 좋아요

가는 시간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살게 하는 것 같아요

강물이 흘러 흘러 바다에 다다르듯/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앞에 장사 없네요.”

 

사별 후 깊은 우울감에서 벗어난 후 10년 넘게 홀로 산 나이든 여인의 잔잔한 위의 이야기가 삶을 사랑하고 자신을 이해한 숭고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노년초월은 인생의 전 과정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찰이라면 이는 노년기를 향하는 우리 모두와 이어져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고 더욱 사랑하는 것’이 노년의 그 때를 안식하는 재치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금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실 시골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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