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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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 승인 2003.03.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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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귀머거리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장애를 이겨내고 독창적인 한국화를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사랑과 헌신으로 일관했던 사람 운보 김기창.

1914년 금광업을 하던 김승환씨와 한윤명씨 사이에서 태어난 운보는 7살 때인 1920년 큰 불행을 맞게 된다. 보통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12살에 다시 입학해야 했고 또래들로부터 바보, 병신, 귀머거리라는 놀림을 당하며 16살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7세 때인 1930년 당대 화단의 1인자인 以堂 金殷鎬 화숙에 들어가 1년 만인 1931년 10회 조선미술 전람회에 소녀 넷이 널뛰는 장면을 묘사한 '板上跳舞'로 입상하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다. 이후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인물화와 花鳥를 많이 그렸으며 작품에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한국 전쟁 때였다.

운보는 1950년 처가가 있는 군산으로 피난. 처가의 헛간을 화실로 개조해 새로운 작업 '예수의 일생'이란 대업을 완수했다. 어려서부터 예배당에 다닌 운보는 한국사람의 얼굴, 복식으로 성경내용에 따라 29점을 완성했는데 이 그림을 본 독일 신부가 예수의 부활이 빠졌다면서 1점을 더 그리자고 전해 '예수의 일생'은 30점 시리즈가 되었다.

친정의 극심한 반대 속에 결혼하여 평생을 반려자이며 예술적 동지였던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은 미국 유학시절 고생과 과로로 병을 얻어 1976년 1월 2일 타계. 운보와의 부부생활을 마감했지만 운보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고자 작품제작에 열중해 그해 5월 남경화랑에서 '바보산수전'을 열었다.

'바보산수'란 우리 민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독창성 있는 작품으로 관념화가 판치던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만들어 낸 진경산수에 비길 만큼 미술사에 남는 큰 업적이다.

운보는 동양화단에서 맨 먼저 추상작업을 한 작가이기도 하다. 1965년 청자의 이미지, 심상의 이미지를 발표, 동양화 추상의 프런티어로 각광 받았다.
이 외에도 청록산수로 불리는 '청산도', 문자를 형상화한 '字畵美術'도 운보 예술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다양하다고 최선은 아니겠지만 운보의 예술 세계는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수놓았다.

法古創新의 정신이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서구화 일변도의 풍토에서도 전통의 붓을 놓지 않았고 전통의 기초화에 새로운 한국화의 현대화 작업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이제 그는 고인이 되어 사랑하는 부인 우향의 곁에 잠들게 되었으나, 그가 평생동안 제작하여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연 1만 5000여 점의 작품들은 86년 설립한 장애인이면서 장애인 복지를 위해 헌신했던 아름다운 그의 삶과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김영권(백록화랑 대표, 백록당 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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