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206] 벽疫神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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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206] 벽疫神方
  • 승인 2004.06.1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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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덩이 같던 그해 여름의 毒疫

1613년 許浚이 왕명을 받아 당시 전국을 휩쓴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급하게 저술한 防疫書이다. 이 책의 간행 동기는 1612년 함경도에서부터 疫려가 발생하여 다음해 전국에 퍼지게 되자, 中宗代에 나온 『簡易벽瘟方』을 다시 인출하여 각도에 배포했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왕은 허준에게 명하여 『新纂벽溫方』을 印頒케 하였다. 이때의 사정은 李廷龜가 쓴 『신찬벽온방』 서문에 잘 나타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역은 가라앉지 않았고, 또 여름에 접어들면서 악질인 唐毒疫이 유행하여 사망자가 많아지게 되자 내의원에서는 서둘러 이 책을 간행하게 된 것이다.

1권 1책의 內醫院字本(훈련도감활자)으로 光海君 5년 12월에 간행되어 이듬해 4월에 太白山 史庫에 內賜되었던 원본이다. 표지 안쪽에는 “萬曆四十二年四月日 內賜벽疫神方一件太白山上 左承旨臣李(手決)”라는 內賜記가 있다.

책머리에는 허준의 공신존호와 함께 ‘奉敎撰(왕명을 받아 지었다는 뜻)’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고, 곧바로 뒤에 ‘당독역’의 병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어 서문인지 본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식 요건을 과감히 생략한 채 절실하고 급한 내용만 간추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火運之歲多熱疾’에서 질병이 일어나는 원인을 운기론으로 설명하였고, ‘毒疫卽疹也’에서는 독역의 종류를 형태에 따라 痘, 반, 疹 3가지로 분류해 놓았다. ‘毒疫專屬心火’에서는 독역의 유행과 피부증상이 발현하게 되는 병리관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毒疫換形’, ‘毒疫善暴死’, ‘毒疫形證’, ‘毒疫治法’이 그 뒤를 잇고 있으며 처방은 모두 뒤의 藥方편에 수록되어 있다. ‘毒疫豫防’에는 三豆飮, 芎芷香蘇散 등의 예방약과 조(조)角末, 石雄黃末, 蒼朮牛糞 등을 상복하라고 하였다. ‘毒疫鍼法’에서는 咽喉腫痛으로 기도가 폐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속히 침자하여 惡血을 출혈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설명하고 있다.

‘藥方’에는 十神湯, 九味羌活湯, 淸熱解毒散, 大柴胡湯, 凉膈散, 調胃承氣湯, 防風通聖散, 荊防敗毒散, 人蔘白虎湯, 竹葉石膏湯 등 치료약의 효능 및 조제방법과 용법 등을 기록하였다. 각 처방에는 일일이 出典을 밝혔는데, 대부분은 『동의보감』에서 選錄한 것으로 ‘醫鑑’으로 略記되어 있고 기타 入門, 東垣, 節齋, 回春, 丹心, 傷寒, 仲景, 正傳, 得效 등을 인용하였다.

맨 마지막에는 月經水, 臘雪水, 人糞汁, 猪糞汁, 地龍汁 등 온역을 다스리는 약물의 효능과 용법에 대해 각각 설명하고 있는데, 모두 本草 〔證類本草〕에서 채록한 것이다.

‘唐毒疫’이란 오늘날의 猩紅熱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 때 갑자기 마주친 이 이름모를 역병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허준 조차도 “역대 어느 의서를 들춰보아도 병명과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혹심한 악질 〔罕世之酷疾〕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전의 보통 온역과는 달리 극심한 증상을 보였으므로, 마치 오랑캐처럼 혹독하다는 뜻에서 ‘唐’자를 앞에 붙여 ‘唐학’ 또는 ‘唐瘡’이라 썼고 민간에서는 ‘唐紅疫’이라고도 불렀다. 『光海君日記』와 이수광의 『芝峯類說』에도 이 병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 때문에 생긴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당시 의원들은 ‘獄瘟’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막연한 원혼기인설을 물리치고 『內經』의 運氣論에 근거하여 熱性病의 유행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여러 유사 질환으로부터 감별 진단하여 제시한 성홍열에 대한 기록은 세계 전염병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빠른 시기의 업적이라 하니 새삼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전염병에 관해 별 자료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여러 가지 전염병의 유행을 경험한 편자가 온 정력을 기울여 수개월에 걸쳐 완성한 책이며, 전염병 치료법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근간에 의성 허준의 의학사적을 조명하게 될 ‘허준기념관’이 개관을 앞두고 준비 중이며, 유명무실해졌던 ‘구암학회’를 재건하고자 뜻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042)868-9442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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