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原者에 대하여(07)- 과학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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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原者에 대하여(07)- 과학과 종교
  • 승인 2020.03.27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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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모

김선모

mjmedi@mjmedi.com


 

1. 과학과 종교의 공존

신앙과 과학적 사고의 차이는 무엇인가?

학부때 그런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다. 의사가 어떻게 하느님을 믿을 수 있을까? 과학적 사고를 하면서 종교에 심취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에 답을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과학적 사고로 해석할 수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절반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천문학과 교수님과의 대화 중 과학도 믿음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 때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과학도 믿음이고 종교도 믿음이라면 과학과 종교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는 뜻일까? 과학이 아직까지 부정(否定)되지 않은 최종 가설(假說)’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과학 또한 믿음이라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가설이 최종적이고 불변의 진리라 단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신뢰의 뜻을 지닌 것이지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믿음과 같을 수는 없다.

그 논리적 타당성의 측면에서도 과학과 종교는 그 경계가 명확하다.

과학적 가설들의 논리적 타당성은 과학적 해석이 가능한 세계의 현상에 대한 관찰에서 나온다. , 현상의 관찰을 인간지성(人間知性)을 통해 연역(演繹)하고 귀납(歸納)하여 예측되는 결과를 확인, 재연할 수 있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과학적 가설에 합리성과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반면 종교적 신앙은 과학적 사고로 해석되지 않는 범주에서의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논거(論據)나 검증(檢證)과 같은 타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없는 주관적(主觀的) 믿음이다.

이러한 명백한 차이 때문에 과학과 종교를 함께 믿는다는 것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적 사고를 통해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신()의 영역으로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율배반적인 과학과 종교가 공존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종교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사고로 해석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겸손이 신()이라는 존재로 대변되는 무지(無知)의 영역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으로 나타났기 때문인 것이다.

 

2. 한의학 폄훼

하지만 무지(無知)의 영역에 대한 자세는 과학과 종교의 공존(共存)과 같은 아름다운 형태만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종교의 형태이건 아니건간에 과학적 사고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는 마치 이성적 사고가 작동되지 못하는 미개한 종교적 세계라 부정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와 다름에 대한 두려움이 인종차별이라는 비열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한의사를 무당이라, 한의학을 무당질이라 조롱하는 댓글들을 매우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유포하고 있는 양의사들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전세계에서 한의학이 온전한 의학으로서 유일하게 국가 의료체계에 소속된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는 재론(再論)의 여지없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만이 실존(實存)하는 세계라 고집하는 아집(我執)의 결과이며 나만이 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탐욕(貪慾)의 현상이다.

같은 의학을 공부하더라도 질병의 치료대상을 침범당한 인간(人間)’은 배제하고 오직 침범한 병인(病因)의 공격(攻擊)과 박멸(撲滅)’에만 관심있는 편협된 의학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3. 한의학은 이성적 논리체계

한의학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적 비이성(非理性)의 학문인가?

앞서 밝혔듯이 과학은 현상의 관찰을 통해 타당성을 얻는다. 그렇다면 한의학은 무엇으로부터 타당성을 얻는가? 한의학 또한 이성적(理性的) 논리체계의 의학으로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현상의 관찰을 통해 타당성을 얻는다.

그렇다면 과학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과학이 오감(五感)을 통한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세계의 인식범주라면 한의학은 제3의 눈을 통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세계의 인식범주이다. 과학이 보여지는 세계의 관찰을 통한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연구결과라면 한의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관찰을 통한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연구결과인 것이다.

 

4. 한의학의 주관적체험 객관화

과학이 객관적(客觀的) 현상관찰을 통한 이성적(理性的) 논리체계로 예측한 결과를 검증함으로써 그 타당성을 확보하듯이 한의학 또한 주관적(主觀的) 현상관찰을 통한 이성적(理性的) 논리체계로 예측한 결과를 검증할 수 있어야 그 타당성을 확보할 것이다.

,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에너지흐름의 체험을 통한 족()양명(陽明)()()의 명명(命名)-논리체계로 어떠한 복통(腹痛)에 족삼리(足三里)가 어떠한 작용할 것인지에 대한 예측결과를 검증함으로써 그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그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결과제(先決課題)가 있다. 바로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의 체험이 주관적(主觀的) 범주이기 때문에 필요한 객관화(客觀化)의 과정이다.

객관(客觀)이란 나의 입장에서 벗어나 제 3(())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말이다. 객관(客觀)이란 내가 나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주관(主觀)이 전제되어야 성립되는 개념이다. 과학의 객관적(客觀的) 현상관찰은 이미 나도 주관적(主觀的)으로 인지하고 너도 주관적(主觀的)으로 인지할 수 있다는 인정(認定)의 전제(前提)가 포함되어 있다.

반면 한의학의 주관적(主觀的) 현상관찰이 객관화(客觀化) 되기 위해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주관적(主觀的) 현상관찰의 공유과정(公有過程)이 있어야만 한다.

오감(五感)의 세계, 객관(客觀) 세계에서의 관찰을 통한 과학이론은 그 예측의 결과공유가 쉽기 때문에 그 타당성판단 또한 매우 쉽지만, 성정(性情)의 세계, 주관(主觀)의 세계가 관찰 대상인 한의학이론은 객관화(客觀化)-공유과정(公有過程)과 타당성판단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주관적(主觀的) 관찰이 공유되기 위해선 주관적 관찰의 대상에 대한 이해방법이 함께 숙지(熟知)되어야만 가능하다.

 

5. 황제내경은 관찰기록의 보고(寶庫)

황제내경은 그 관찰대상과 방법에 대한 방대하고도 상세한 기록의 보고(寶庫)이다.

생명의 에너지 공급원은 어디인지, 에너지 공급원으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는 어떻게 분리되는지, 청탁활삽(淸濁滑澁)에 따른 에너지는 어떤 다른 경로로 운반되는지, 무려 85개에 달하는 에너지들이 어떠한 경로를 어떠한 깊이와 얼마의 속도로 어떠한 관문을 통해 언제 이동하는지 등 그 기록은 경이로울만큼 상세하다.

하늘과 땅의 에너지의 종류와 각각의 변화들이 자연계와 인체에 일으키는 변화 등 그 관찰의 결과는 경탄할 만큼 넓고 그 연구관찰은 집요하리만치 오랜 기간 집약되었다.

황제내경은 이미 관찰대상에 대한 많은 연구결과들을 밝혀 놓았다. 주관적체험의 객관화를 위해 황제내경의 올바른 해석이 시급한 이유이다.

 

6. 한의학의 현실

하지만 너무도 어렵게 함축된 암호로 쓰여진 탓에 인류(人類)의 부단(不斷)하고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체험은 커녕 체험의 지도인 경맥(經脈)의 흐름조차 명확히 밝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한의사들조차 그 암호가 풀릴 것이라 기대하는 이가 드물어졌으며 이제 그만 객관적 경험에 기반한 의학에 기대도 되지 않겠냐는 자조적(自嘲的)인 목소리가 팽배해졌다. 아예 황제내경의 근본적인 진위(眞僞)를 서지학적(書誌學的)으로 의심해봐야 한다는 근원적 부정론(否定論)도 드세다.

오죽하면 국가적 의료재난상태에서 국가의료의 한 축을 맡고 있는 한의사가 한의학을 이야기 하는 것조차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지경에 이르렀을까.

 

7. 물질문명과 반쪽짜리 과학

물질문명의 눈부신 발달 이면(裏面)에 인간에 대한 존중(尊重)이 위협받고 있는 것은 의학에서 한의학의 존재가 위태로워진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인간존중의 피를 빨아 자본과 권력을 송두리째 차지한 물질문명은 존엄(尊嚴)한 인간의 몸을 치료의 염두(念頭)에서 지워버린 오만방자한 반쪽짜리 과학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말이다.

절반(折半)의 세계만을 해석할 수 있는 과학은 인간성정(人間性情)의 해석에 그 절반(折半)을 양보해야만 한다.

한쪽 밖에 뜨지 못하는 눈을 자랑하며 두 눈 뜬 사람을 깔깔대고 조롱하는 반쪽짜리 과학도들은 양심있는 과학자들이 신()의 영역으로라도 남겨 놓았던 무지(無知)의 영역에 대한 겸양(謙讓)과 이해(理解)의 자세에서 무엇을 배워야할지 성찰(省察)해야할 것이다.

 

8. 동의사(東醫師)의 책무

두 눈을 뜨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사문도 대소지(下士聞道 大笑之)’

애꾸의 비웃음에 한쪽 눈을 슬그머니 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눈을 뜨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무지(無知)의 영역이다. 두 눈을 가졌다는 사실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긍지를 가져야 할 때이다. 그 날이 멀지 않았다.

 

김선모/반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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