業醫 惠庵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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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醫 惠庵에 대한 연구
  • 승인 2020.04.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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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mjmedi@mjmedi.com


임상 한의사 3인이 연구한 황도순, 황도연 (55)

그동안의 원고가 <方藥合編>, <醫宗損益>, <本草附方便覽> 등 여러 의서의 저자로서 惠庵에 대한 내용이었다면 이번 호에서는 개원의 시각으로 구한말 惠庵에 대하여 조망하고자 한다. 필자 또한 개업하고 있는 임상의들이다. 개업의로서 惠庵의 모습은 어땠을지 궁금한 주제들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惠庵은 언제부터 개업하였는지, 어디서 개업하고 있었는지, 한의원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등에 대하여 기존의 원고 형식을 벗어나서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자유롭게 서술하고자 한다.


1. 惠庵은 醫科에 합격하였을까?

조선시대 醫科에 급제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醫科榜目에는 黃道淳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惠庵은 <醫宗損益附餘> 序文에 “吾家世業擧不中(우리 집안은 대대로 科擧 공부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여)”라고 한 것으로 보아 惠庵을 포함하여 집안 대대로 科擧에는 합격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惠庵은 <醫宗損益> 跋文에 “十五廢擧業, 十六學黃神(15세에 과거공부를 접고, 16세에 의학을 공부하였다)”라고 하여 의학 공부를 새로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惠庵은 雜科 중 醫科를 거치지 않고 醫人이 된 것으로 보인다.

 

2. 惠庵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개업하였을까?

<對譯脈證·方藥合編>의 黃度淵 小傳1)에 “황도연선생이 철종조 이래···…藥局을 운영하여”라고 하여 황도연이 철종 때부터 개업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承政院日記> 憲宗 13(1847년)에 “李根友以內醫院都提調提調意啓曰, 議藥同參李鎭夏有頉代, 醫人黃道淳差下, 令該曹口傳付軍職, 冠帶常仕, 何如? 傳曰, 允.”이라 하여 議藥同參으로 醫人黃道淳이 나오고, 당시 業醫 중 저명한 사람을 議藥同參으로 채용하였으므로 惠庵은 이미 憲宗 때부터 개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承政院日記> 高宗 7(1870년)에 “內醫院啓曰, 議藥同參黃道淳減下, 方外吳漢寬差下事, 命下矣, 依下敎, 議藥同參差下, 令該曹口傳付軍職, 冠帶常仕, 何如? 傳曰, 允.”이라 하여 黃道淳이 사직한 사실을 알 수 있다. 黃道淳이 사직 후 1884년 사망하기 전까지 개업 여부에 대한 자료는 현재까지 없다.

 

3. 惠庵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일제강점기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의사였던 Newton H. Bowman2)은 <方藥合編>의 저자가 黃道淳이고, 그가 석정동에서 산다고 밝히고 있다(Therefore a new book called the Pang-yak-hap-pyun(방약합편 方藥合編) was written by one Whang-do-soon(황도슌 黃道淳) a Korean doctor and scholar of the Chinese classics living at Sauk-chung-dong(셕졍동 石井洞) Seoul, Korea.)(그림 1).

 

石井洞은 오늘날 서울 종로구 慶雲洞으로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慶幸坊 지역이었으며, 1914년 校洞과 石井洞을 통합하여 慶雲洞이 되었다.3)

 

4. 惠庵은 어디에서 개업하였을까?

 

三木榮은 <朝鮮醫籍考>4), <朝鮮醫書誌>5)와 <朝鮮醫學史及疾病史>6)에서 각각 “京城武橋にて開業”, “京城武橋にて門戶を張る”, “京城武橋で医業を開き”라고 하여 京城의 武橋를 개업 장소로 지목하였다(표 1). <對譯脈證·方藥合編>의 黃度淵 小傳에는 “황도연선생이···…무교동에서···…藥局을 운영하여”라고 하여 황도연이 무교동에서 개업하였다고 되어 있다. 김성수7)는 “17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조선의 의료 환경이 점차로 변화하고 있었다. 정부의 禁制에도 불구하고, 사설 의원과 약국이 대도시인 한양을 중심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라고 하여 惠庵의 京城 개업이 당시 시대상과 어느 정도 합치됨을 알 수 있다.

三木榮은 武橋贊化堂藏板이라는 글자를 통해 惠庵의 약방이 贊化堂이고, 그 약방은 武橋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논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의 개업은 오늘날과 달리 집에서 약방을 같이 운영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武橋와 石井洞이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그림 28)) 惠庵의 약방은 武橋가 아니라 거주지인 石井洞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 惠庵의 약방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三木榮은 <朝鮮醫籍考>와 <朝鮮醫書誌>에서 惠庵의 약방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朝鮮醫學史及疾病史>6)에는 “黃度淵···…薬堂を贊化堂と云う”라고 하였다(표 1). <對譯脈證·方藥合編>의 黃度淵 小傳에 “황도연선생이···…‘贊化堂’이라는 藥局을 운영하여···…”라고 하여 藥局 이름을 ‘贊化堂’이라 하였다. 기창덕9)은 “惠庵은 서실을 유예실(游藝室)이라 했고 약당은 찬화당(贊化堂)이라 부르면서 동의보감의 실용화를 연구하고 있었다.···…『醫宗損益』 (12권)은 부록 약성가(藥性歌)를 합하여 7책으로 그의 찬화당에서 간행하였다.”라고 하였다.

贊化堂에 대하여 황연규10)는 “<의종손익>은 “武橋贊化堂藏板”이라 되어 있는데 “찬화당”은 의업의 이름이라기 보다 조선시대 京板의 刊行處로 해석해야 옳을 듯하다.”고 하였고, 이진철11)도 “ 『의종손익』의 표지 등을 비교해보면 황도연이 머물고 책을 쓴 곳은 游藝室이고, 贊化堂은 약방이 아니고 무교동에서 비소설 한문방각본을 찍어내던 간행처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기창덕처럼 ‘贊化堂’이 惠庵의 약방 이름이자 동시에 惠庵 자신의 저서인 <醫宗損益> 等을 출판한 간행소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약방들이 ‘聖恩堂藥房’12)처럼 ‘堂’이라는 상호를 보편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贊化堂은 惠庵의 藥房 이름으로 추정된다. 다만 간행소와 약방 이름은 동일하게 贊化堂이지만 약방 贊化堂은 주거지와 동일한 石井洞에 있었고, <醫宗損益>을 출판한 간행소 贊化堂은 武橋洞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남산당편집국, 對譯證脈·方藥合編, 남산당, 1977:5-1.

2. N. H. Bowman, The History of Korean Medicine,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1915; Volume VI(part I): pp.1-34.

3. 한국민족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7017)

4. 三木榮, 朝鮮醫籍考, 自家出版, 1935:57-59.

5. 三木榮, 朝鮮醫書誌, 學術院圖書刊行會, 1956:149-152.

6.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大阪, 自家出版(再版), 1963:257, 348.

7. 김성수, 조선시대 儒醫의 형성과 변화, 한국의사학회지, 2015:28(2):105-120.

8. 서울역사박물관, 옛서울지도, 서울역사박물관, 2016:99.

9. 기창덕, 한의학의 역사, 의사학, 1999:8(1):1-14.

10. 황연규, <醫方活套>의 黃度淵선생에 疑問들, 다음 블로그 2007.12.12. 게시,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Lry&articleno=14997430&categoryId=4&regdt=20071212142534).

11. 이진철, 의종손익을 통해 살펴본 황도연의 의학사상 연구, 2017,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2. 김용진, 한국간판디자인의 시대적 변천과 조형적 특성, 2016,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기춘·서정철·최순화 / mc맥한의원·우리경희한의원·보광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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