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8체질] 제대로 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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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8체질] 제대로 묻기
  • 승인 2020.04.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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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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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13

廉泰煥 선생이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體質醫學 전공으로 權度杬 선생의 1호 제자가 되었을 때, 어느날 선생께 ‘체질맥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했다. 권도원 선생의 대답은 ‘그냥 잡아’1)였다. 그냥 잡으라니 염태환 선생은 당황스러웠다. 금양체질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나 자상함이 부족하긴 해도, 이건 ‘너에게 가르쳐 주기가 싫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체질맥진은 나의 식이 아니라 너의 方式대로 잡아야 한다’는 뜻을 간단하게 표현하여 전달한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래도 체질맥진 초보자에게 그건 너무 심했다. 얼마나 긴 시간, 과연 몇 명을 잡아야 자기 방식이 생기겠냐는 말이다. 권도원 선생은 수십만 명은 잡아봐야 된다고 했으니, 그런 水準에 이르는 동안에는 체질감별을 제대로 못하고 계속 헤매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한 노릇이다.

態度의 차이 역시 체질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체질마다 묻는 방식도, 답변하는 태도도 다르다. 가령 토양체질의 경우에, 질문을 하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誇示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배경 정보를 나열한다. 마치 ‘나는 이렇게 많이 공부해봤어요. 그런데 이 분야는 조금 모르겠네요’하는 것 같다. 이런 토양체질에게 물어볼 땐 여러 다양한 지식을 섭취하게 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금양체질은 보통 핵심만 간단하게 말한다. 그 질문이나 대답이 나온 과정이나 배경은 밝히지 않는다. 그걸 꼬치꼬치 캐물으면 상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하고, 관계를 끊어 버리기도 한다. 때로 밝혀진 사실을 외면하거나 의도적으로 歪曲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답변은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고 곰곰이 곱씹어 보아야 한다.

반대로 목양체질은 頭緖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장황해진다. 자신의 질문 안에 스스로 迷路를 만드는 꼴이다. 그 주제와 관련된 것을 낱낱이,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나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그는 묻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제의 핵심을 모르고 있으니 애초에 질문 자체를 체계 있게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양체질은 이것도 고려하고 저것도 생각하고 챙겨두어야 할 것이 많다. 생각이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한다. 전진과 후퇴의 문제가 아니라 일단은 왼쪽 것이냐 오른쪽 것이냐의 문제다. 그래서 少陰人에게 있는 不安定之心은 근본적으로 여럿 중에서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 뺨도 내밀어라. 이렇게 說破하였다. 이건 금양체질의 話法이다. 핵심만 말하고 결론만 말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나 논리의 과정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자세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 있으면 직접 설명하지 않고 比喩法을 쓴다. 그렇게 되면 그의 말을 듣고 믿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여러 가지 解釋의 여지를 남겨두게 된다. 그래서 推仰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결론을 미리 먼저 들었다. 그런 후에 그곳에 이르는 다양한 方法論을 저마다 窮究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基督敎의 歷史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목음체질이므로 다른 일곱 체질이 지닌 태도나 표현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 쓰는 내용은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내가 택했던 방식과 그런 방법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은 것에 대한 소개이다. 만일 목음체질인 독자라면 금방 공감이 되고 이해가 쉬울 것이다.

 

(1) 몸으로 하는 功扶

머리로 하는 공부는 知識을 쌓고 그것을 解得하는 일이고, 몸으로 하는 功扶(kung fu)는 익숙해지고 또 세련되게 修鍊하는 일이다.

8체질의학에서는 머리뿐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부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體質脈診과 體質鍼管 시술법이다. 물론 이때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건 생각이 아무리 깊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결코 熟練할 수 없으니 큰 문제다.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맥진과 刺鍼 기술의 核心을 깨달아야만 한다.

체질맥진을 獨學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은 핵심을 적어놓은 것을 보고 머리로 알았다고 해서 그게 몸을 통해서 구현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핵심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전달해 주어야만 가능성이 있다. 맥을 잡는 것을 지켜보고 또 직접 잡혀서 느껴보면서 가르쳐주어야 한다. 投手가 여러 球質에 대한 그립(grip)을 다 알았다고 해서, 실제로 모든 종류의 공을 자유자재로 효과적으로 던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바로 노련한 투수코치가 필요한 이유다.

체질침관 사용법도 체질맥진 만큼은 아니지만 핵심을 모르면 제대로 구사하기 어려운 기술이다. 그런데 이것은 핵심만 깨우치면 그 다음에는 숙달하기가 비교적 쉽다. 정확한 깊이로 痛覺이 거의 없도록 자침할 수 있어야 한다.

 

(2) 卽答을 요구하는 社會

대중과 사회는 일반화되고 간편하고 즉시적인 답변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노니는 우리 남편에게 좋은가요?’, ‘돼지감자는 당뇨환자에게 적합한가요?’, ‘당뇨에는 여주가 좋지요?’ 이런 식이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장하는 대표적인 매체가 바로 TV이다. 8체질의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하는 한의사들도 이런 방식에 길들어 있다. 지식이 얕은 자의 질문은 즉각적이다. 처음 보는 물건을 보고 ‘이게 뭐야?’ 하고 묻는 어린 아이의 태도와 같다.

싸움에서 서로 치고 받는, 그래서 흥미진진한 局面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싸우는 상대의 水準이 비슷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방적인 暴力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듯이 함부로 덤벼드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당신과 對等하게 붙고 싶다’고 자꾸 우긴다. 인류 역사 속에서 大衆은 항상 淺薄하고 愚昧했다. 그래서 대중은 늘 ‘함부로 우기는’ 사람의 주장에 더 쉽게 傾倒된다. 이것이 현실이고 해결될 수 없는 아이러니다.

4구 당구로 100점을 치는 사람이, 어느 날 市中에 150점이나 혹 200점을 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흥미롭다면서 게시판에 옮겨놓았다. 그런데 그건 혹시 50점이나 80점을 치는 사람이 뱉은 뻥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몇천점 쯤 치는 사람이 그냥 우연히 그것을 보고 안타까워서, 약간의 叱責을 하고 그의 水準에 맞는 팁(tip)을 몇 가지 건네주었다. 그런데 100점을 치는 그가 다음날 그 팁을 가지고 맞니 안 맞니 따지기 시작했다. 그 팁은 그의 수준에 맞춘 方便說法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3) 사람이 먼저다

體質論을 공부한다면서 종종 체질이 다름이라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 체질에 대해서 상대에게 말한다고 하면서 자주 相對를 妄覺한다. 물론 그는 체질이 다름이라는 것을 안다고 主張한다. 그 당연한 것을 어찌 잊겠느냐고 抗辯한다.

“사람이 먼저다”는 문재인의 口號다. 체질론에 기반을 둔 질병 치료도 똑같다. 사람이 먼저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질병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아야 한다. 그게 치료의 시작이다. 그건 바로 그 사람 그 體質을 먼저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問答에서도 똑같다. 나누는 내용보다 상대의 체질이 우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 질문을 받아 주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4) 잘 몰라야 한다

잘 물으려면, 많이 알기보다는 자기가 정말 무엇을 모르는지 잘 알아야만 한다. 제대로 묻기 위해서는 잘 몰라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자기가 모르는 그것을 쉽게 물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질문을 받은 상대가 (그런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수준을 잘 살펴서,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답변을 平易한 언어로 들려줄 수 있는 것이다.

질문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물어오는지를 보면, 그가 진정 자신이 알고 싶은 것에 대한 개념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어설픈 질문자는 질문을 막 날린다. 그렇게 되면 답변을 하는 처지에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진다. 분명 질문하는 사람이 더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답변을 건네야 한다. 하지만 그가 지금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 답답해진다. 혹시라도 답변을 회피하면 ‘그것도 모르냐’며 욕한다. 그런 게 자신의 수준인데 스스로는 절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좋은 질문이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罪가 아니다.

묻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몰라서 묻는 것은 失禮가 아니다.

 

(5) 所感을 남겨라

남이 하는 講義나 남이 쓴 冊은 먼저 공부한 사람이 자기가 알게 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강의나 책을 잘 보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 그건 그저 남이 한 공부를 구경만 한 것이니 말이다. 반드시 자기의 소감을 정리해서 남겨야 한다.

그런데 소감이란 좋고 나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반드시 글로 표현해야 한다. 먼저 내용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추린다. 거기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덧붙인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을 갖게 되었다면 그건 아주 바람직한 것이다. 나아가 講師나 著者에게서 부족한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꼭 넣는다.

소감이란 지식에 대한 消化다. 씹고 부수고 녹여서 精微로운 것을 골라내어 몸속에 쌓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의 것이 된다.

소감을 글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말을 하다가 보면 자기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자기 것으로 정리되지 않은 것은 편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의를 하는 사람들, 책을 쓰는 사람들도 자랑하는 것 뒤에 그런 이유를 감추고 있다. 사실은 앎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야 진정한 앎으로 나갈 수 있다.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이강재 '체질맥진' 행림서원 2017. 4. 10. p.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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