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회고록 속 신홍균 군의관…대전자령 전투 대승 이끈 한의사의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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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회고록 속 신홍균 군의관…대전자령 전투 대승 이끈 한의사의 기지
  • 승인 2020.05.0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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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식

신민식

mjmedi@mjmedi.com


신민식 병원장의 [한의사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3)
신민식 잠실자생한방병원장
신민식
잠실자생한방병원장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고단한 여정 속에서 집안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기 위해 작은 단서 하나가 절실해질 그 때. 작은 희망의 씨앗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늘 걷던 거리지만, 우연히 마주친 예쁜 들꽃처럼 작은할아버지 신홍균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을 입증해줄 결정적인 단서를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일본에서 귀국 후 대진단에 관한 논문을 쓴 국민대학교 이계형 교수를 만났다. 이계형 교수는 원종교 대정원장 ‘신OO’이 ‘신흘’이고, 신흘이 ‘신홍균’ 선생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서인 ‘월남유서’의 재간본에는 없는 내용이 초간본에 있을 수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 보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그 길로 월남유서의 초간본을 확인하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월남유서 초간본<사진제공=자생한방병원>

월남유서는 1959년 펜으로 쓴 초간본과 1969년 붓으로 쓴 재간본이 있다. 초간본을 펜으로 쓴 탓에 내용을 제대로 알기 힘들지만, 재간본은 붓으로 굵게 쓴 덕분에 읽기 수월했다. 형님이 초간본과 재간본을 보관하고 있었기에 형님께 초간본을 정밀 촬영한 뒤에 살펴 보자고 말씀드렸다. 그러던 중 초간본에서 놀랍게도 ‘신홍균 개명 신흘’이라는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읽기 편하다는 이유로 형님과 내가 재간본만 봐았던 터라 이러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월남유서 초간본 <사진제공=자생한방병원>

촬영한 파일을 확대해서 보고 유서 속 ‘신홍균 개명 신흘’이라는 문장을 찾았을 때 전율로 흥분이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일단 친형인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찾았습니다! 월남유서 초간본에 신홍균 개명 신흘이라는 문장이 있고, 신흘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는 자료도 있으니 작은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하자 형님도 오랜 시간 묻어둘 수 밖에 없던 역사적 사실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감격했다.

월남유서 속 기재돼 있는 '신홍균 개명 신흘'이라는 문구.

신홍균 선생이 신흘로 개명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작은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 사례가 고구마 줄기 캐듯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지청천 장군의 비서역할할을 하고 대전자령 전투에 참전했던 조경한 선생의 ‘백강회고록’이라는 책에 있었다. 백강회고록에는 신흘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대전자령 전투 당시 군의관으로 직접 전투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월남유서 속 기재돼 있는 '신홍균 개명 신흘'이라는 문구.
월남유서 속
기재돼 있는
'신홍균 개명 신흘'이라는 문구.

 

조경한 선생은 대전자령 전투에 있었던 신홍균 선생의 일화를 상세하게 글로 남겼다. 1933년 7월, 한국독립군과 중국군은 대잔자령을 지나는 일본군을 습격하기 위해 매복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장대와 같은 비가 계속 되자 일본군의 일정도 연기가 되면서 한∙중 연합군은 산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기 시작했다. 그때 신홍균 선생이 매복지 주위에서 식용 버섯을 채취해 독립군에게 식량으로 쓰는 기지를 발휘한다. 신홍균 선생의 기지로 병사들은 배고픔을 덜고 지친 몸을 정비할 수 있었다. 군의관이면서 약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한의사의 강점을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신홍균 선생의 공적은 조경한 선생을 감동시켰다. 이러한 일화는 조경한 선생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전자령대첩> / (조경한, 대전자대첩-항일무력투쟁의 한 단면사, 1980, 91-93쪽)

나라가 망하니 지사들이 앞다투어 망명했네. 이역에서 군량모아 양병하니 와신상담하는 맛을 견줄 데 없네.

(중략)

왕청현 대전자 깊은 골짜기에 飯塚(반총∙이즈카, 일본군 부대명)의 이리떼 지난다기에 계유년(1933) 6월 동경성에서 정병을 이끌고 불원천리 달려갔네. 높은 고개, 험한 숲 넘고 헤쳐 수백 리 단장의 그 고초를 어찌 다 말을 하리요.

(중략)

해와 달 뜨고 지기 세 차례이건만 기다리는 이리떼는 아직도 보이지 않네. 바닥난 군량은 굶주림을 더하고, 장맛비 차가움 뼛속에 스며든다. 검정버섯 따다가 소금 절여 먹어보니 요기도 되려니와 치풍도 된다누나. 어여쁘다. 이 기방 누구에서 나왔느냐. 그는 바로 군의관 신굴(申矻)이다.

 

백강회고록에는 대전자령 전투 이후의 기록도 있었다. 전투는 대승으로 끝났지만, 한국독립군과 중국군의 갈등이 격하되는 과정에서 중국군은 지청천 장군을 음해해 무고한 많은 장교와 사병들을 구금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때 신홍균 선생은 구금되지 않았는데, 당시 군의관이었던 만큼 의료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중국군에 의해 지청천 장군의 목숨이 위험해졌을 때 신홍균 선생은 지청천 장군을 살리기 위해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신홍균 선생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이 모습을 본 중국군은 지청천 장군을 풀어준다. 지청천 장군은 신홍균 선생에게 독립운동의 스승 격인 인물이었던 만큼 꼭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펼쳐지면서 한∙중 연합군은 갈라서게 되고, 한국독립군 가운데 일부는 상해임시정부로, 신홍균 선생은 동승촌 목단강쪽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간다.

이 같은 귀중한 역사적 사실을 발굴했지만 또 다시 문제에 봉착했다. 조경한 선생의 회고록에는 신홍균 선생의 가명을 한글로 신흘로 적었는데, 한자로는 신굴(申矻)로 표기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서훈 심사 과정에서 지적되기도 했다. 신흘 선생이 원종교 대정원장으로 활동한 것은 인정하지만, 왜 신굴이라고 표기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대전자령 전투에 대한 다양한 사료를 열람하면서 신흘과 신굴을 혼용해서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편집상 실수라고 치부했었다.

그러던 중 또 한 분의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백강회고록을 쓴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 심정섭 선생이다. 비록 조경한 선생은 돌아가셨지만, 희망을 갖기에는 충분했다. 어렵사리 심정섭 선생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붙잡고 입을 뗐다

“백강회고록 속 신흘 선생이 저희 작은할아버지입니다.”

그러자 심정섭 선생은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해줄 이야기가 있으니 광주광역시로 내려오라고 하여 속히 찾아 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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