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95) 매일 아침이 지겨울 때
상태바
[김영호 칼럼](95) 매일 아침이 지겨울 때
  • 승인 2020.05.15 06: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호

김영호

doodis@hanmail.net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김영호
한의사

매일 아침 출근하는 일상이 지겨운가? 혹은 오래 만난 연인과 권태기에 접어들었는가? 지금도 느끼고 있거나 혹은 과거에 강렬했을 그 느낌. 그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퇴사 혹은 이별처럼 큰 용기가 필요한 그것. 오늘은 지겨움에 대한 이야기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적응과정이 필요하다. 새로운 일과 사람을 만난다는 신선함과 설렘이 있는 반면, 새로운 일과 사람에 익숙해질 때까지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운전이 미숙한 초보운전 때처럼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챙겨야 겨우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의식적인 노력이 반복되면서 그 일에 익숙해진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새로운 상대방에게 적응하기 위해 안테나를 세우고 관찰하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 시기에 상대방의 작은 언행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서로 다른 두 인격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동안은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지겨울 틈이 없다.

일이든 사람이든 힘들인 ‘익숙함’을 거쳐야 ‘지겨움’과 만난다. 익숙함을 지나 지겨움이 느껴지는 단계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가 나오는 가장 무르익은 시점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도 적당히 성과가 나고,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관계가 유지되는 시기다.

지겨움의 시간에 진입한 순간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새로운 세계로 탈출하면서 편안한 익숙함과 이별하는 것이다. 스스로 만든 작은 우주를 무너뜨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떠나는 사람, 남겨진 사람 모두에게 이별의 대가는 작지 않다,

또 다른 선택은 익숙한 세계 속에서 새로운 봄을 찾는 일이다.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찾아내고, 이미 누리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새롭게 느껴보는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은 것들이 사라졌을 때를 생각해보며 현재를 감사해 보는 일이 대표적이다. 주변에 있는 당연한 존재들을 하나 씩 떠올리고 적어보면서 새롭게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는 봄기운이 스며든다. 익숙한 곳에서 잠시 떠났을 때 일상이 그리워지듯 가장 소중한 것은 늘 익숙함 속에 있다. <지겨움>은 <익숙한 고마움>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겨움이 사무치게 그리워 질 때가 있다. 일상이 무너질 정도의 운명적 사건과 만났을 때다. 운명적 사건은 개인의 노력으로 피할 수 없다. 엄청난 자연재해처럼 예고도 없이 인생을 덮쳐온다. 이 때 부터는 지겨울 틈이 없다. 오히려 지겹기도 했을법한 평온한 일상이 간절히 그립다. 이렇게 괴로운 시기는 변화의 파도 그 꼭대기에 서 있는 셈이다. 안정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한다.

이렇게 험난한 파도 위에 던져지면 과거의 생각으로는 만날 수 없을 인생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난 모든 경험은 미래를 위한 자산이 된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저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만 칠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지금 이 고통 속에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시기를 통해 우주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혼돈의 시기 속에서 새롭게 열리는 기회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가져볼 수 있다면 분명 차원이 다른 ‘나’로 변하게 된다.

한국 프로야구도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기회가 시작됐다. 한국에서의 경기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중계 된다고 한다. 유래 없는 위기에 빠진 한국 야구였지만 그 위기를 지나는 동안 슬며시 기회가 찾아왔다. 해외 진출을 노리는 국내 선수나 외국인 용병 선수들은 빅 리그를 향해 더 열심히 뛸 것이고 그로 인해 한국 야구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회와 만나게 될 것이다. 야구 외에 여러 분야도 지루한 성장을 벗어나 새로운 기회와 만날 것이다. 일상을 뒤흔드는 위기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 큰 변화의 힘에 의해 우리는 새로운 곳으로 인도된다. 변화의 과정에 큰 고통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지겨운 시간은 지나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지겨움과 위기는 봄과 여름처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다. 지겨움과 만나는 순간 스스로의 결단으로 익숙함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갑자기 위기에 직면해 변화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혹은 익숙한 것들의 의미를 재발견해서 단단히 다져나가는 시기가 될 수도 있다. 아침이 지겹다면 그 동안 수고했다는 반증이자 새로운 위기가 눈앞에 와 있다는 의미다. 지겨움은 내 인생의 국면이 바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다. 낯선 곳으로 뛰어들까? 익숙한 것들에 감사할까? 아니면 기다리다가 운명의 파도를 갑자기 만날까?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을 맞는다면 그건 뭔가를 얻었을 때가 아니라 잃었을 때일 것이다.”

 

김영호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