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독립 영웅의 역사 속 흔적과 후대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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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 영웅의 역사 속 흔적과 후대의 의무
  • 승인 2020.06.05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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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식

신민식

mjmedi@mjmedi.com


신민식 병원장의 [한의사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⑤
신민식잠실자생한방병원장
신민식
잠실자생한방병원장

2019년 11월, 대전자령 전투가 펼쳐졌던 장소를 찾았다. 한의사의 독립운동을 취재하기 위해 동행한 방송팀과 대전자령을 돌아다니며 당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찾고자 노력했다. 직접 금속탐지기를 들고 샅샅이 수색을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웠다. 금속탐지기가 반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광물질이 담긴 돌덩이가 대부분이었다.

만주의 칼바람과 쏟아지는 눈… 악천후 속에서 오랜 시간 작업을 이어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진 못했다. 허무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진작에 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음날 다시 한 번 대전자령을 찾았다. 그때 함께 동행했던 분의 한 마디가 참 힘이 됐다.

“후손 분이 가고 싶은 곳에서 찾아보세요. 할아버지가 인도해주실 겁니다.”

◇사진1. 대전자령 일대. 사진제공=자생한방병원
◇사진1. 대전자령 일대. 사진제공=자생한방병원

 

순간 두 다리가 가벼워졌다.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길을 알려주시지 않을까. 다시 힘을 내 산을 올랐다. 어느덧 정상까지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니 확실히 매복에 효과적이고, 전투지역으로 선정하기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면서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금속탐지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금속탐지기는 내려놓고 그 곳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 없이 파다보니 작은 금속 물체가 흙 속에서 나왔다. 바로 탄피였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바짝 곧추서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어쩌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흔적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유서로만 기억되던, 그리고 잊혀졌던 가문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 갔다. 정말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준 건 아닐까.

◇사진2. 대전자령에서 찾아낸 전투 당시의 탄피. 사진제공=자생한방병원
◇사진2. 대전자령에서 찾아낸 전투 당시의 탄피. 사진제공=자생한방병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꿈같고 신기해서 며칠 동안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했다. 귀국 후에는 서둘러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학예사에게 발견한 탄피를 보여주니 당시 독립군이 많이 사용하던 모신나강이라는 소총에 사용된다고 말했다. 탄피에 나와있는 일련번호와 크기를 보니, 독립군이 썼던 모신나강 소총에 쓰인 탄피가 맞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었다.

가문의 독립운동사를 찾아 나서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후대의 의무다. 대전자령 전투의 현장에서 찾은 것은 작은 탄피일 뿐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영웅들의 흔적은 어딘가 분명히 남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을 따라 걷는 과정 자체가 영웅들의 흔적을 찾는 일이었고, 이는 후대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주고자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길을 인도해주신 것은 아닐까.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했다. 만주 일대가 대표적이었다. 이시영, 이상용 등 많은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작은할아버지인 신흘 선생도 1919년에 만주 일대에 이주했다. 실제로 그 곳을 가보니 눈 앞에 북한이 있고, 압록강의 수위가 낮을 때는 그냥 걸어서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이곳에 가족 모두가 이주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신흘 선생의 가족 또한 요시찰 대상이라서 평소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주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유서인 월남유서에는 당시 신흘 선생이 6000평의 농지를 포기하고 만주로 떠났다고 적혀 있다. 작지 않은 크기의 농지인데, 포기하고 타향살이를 선택할 정도였으니 그 때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견디는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고향을 떠나야 했고, 자신의 이름을 숨겨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잊혀졌다. 하지만 그 영웅들이 무엇을 했는가는 반드시 역사의 흔적이 남는다. 그 역사의 흔적을 후손들이 찾느냐 못 찾느냐의 여부만 있을 뿐이다.

일제시대 많은 한의사(당시 의생)들은 민족의학과 민족정신을 계승했지만 일제의 탄압과 박해로 제도권 밖으로 밀려 나갔다. 당시 강우규, 방주혁, 장용준 선생과 같은 여러 선배 한의사들이 독립운동을 했었는데, 이 숭고한 정신을 한의계에서 대학 교육 등을 통해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역사를 학습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의 연재가 단순히 한 개인 집안의 서훈과정을 서술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의사였던 신홍균(신흘) 선생이 당시의 풍요로운 생활을 거부하고 자신의 굳건한 신념으로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을 되새기면서 오늘날 한의사들이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고유의 민족정기과 전통의식을 가슴 속에 새기길 바라는 마음에 부족한 필력으로 글을 썼다. 선후배 동료 한의사분들이 이러한 심정을 이해하고, 함께 나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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