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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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 승인 2020.06.26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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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린애

김린애

mjmedi@mjmedi.com


도서비평┃갈등하는 번역

“생각에 관한 생각”으로 유명한 대니얼 카너먼, “샌드맨 시리즈”, “멋진 징조들”의 닐 게이먼, “반지의 제왕”의 J. R. R. 톨킨의 공통점이 있다. 소개 글이나 평을 봤을 때는 정말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이었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었을 때는 너무 맘에 들었다. 심지어 다른 책에서 인용한 일부 표현을 보고도 반했다. 그런데 직접 읽었을 때는 도무지 즐겁게 읽히지 않았다. 내가 나의 독서능력이나 취향에 대해 잘못 알았던 것일까? 다행히도 개정판 번역이 나타났고 내 마음은 약간 편해졌다. 유명작가가 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던 책이 국내에 소개되고, 재번역이 필요한 책이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윤영삼 지음, 글항아리 출간

<갈등하는 번역>은 다른 언어, 주로 영어를 사용하는 원저자의 마음속에 있던 의미가 내게 전달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양한 사례와 오답 정리를 통해 보여준다. 번역 실무를 맡은 초보자들이 쉽게 저지를만한 유형의 잘못들을 단어, 문장, 담화 수준으로 분류하고 좀 더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한 생각의 경로와 피할 함정을 안내해주는 교재이다.

단어 수준에서 글을 망치는 예시를 들자면 “가치 편향 어휘”가 있다. “삐쩍 마른 사람”, “저체중인 사람”, “날씬한 사람”이라는 표현 중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쓰는 이의 편향이 드러난다. 과도한 편향이 드러난 글은 쓰는 이가 중립적이지 않다고 알리는 셈이 되니 학문적인 글이나 전문적인 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용역resister’을 잘못 선택하는 것도 단어 수준에서 나타나는 흔한 실수이다. 사용역이란 사용하는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글의 변이이다. 같은 상황을 표현할 때라도 보건 종사자가 읽는 글과 환자에게 안내할 때 쓰는 말은 다르다. ‘좌측 하지 외측의 방산통이 있고 3-5지가 저리며 ROM은 정상’과 ‘허리의 문제로 왼 다리가 아프고 저리신 것 같아요’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단어와 표현의 범위를 달리 선택한 것이다. Diversify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사용역을 고려하면 ‘diversify business’는 ‘사업을 다각화하다’, ‘diversify investment’는 ‘투자를 분산하다’라고 각기 다르게 할 수 있다. 읽는 사람과 상황에 맞춘 사용역을 고려하지 않은 글은 어색하고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문장 수준의 글을 다듬을 때 ‘의’나 ‘은’같은 조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것도 이 책에서 얻은 인상 깊은 조언이다. ‘의’라는 조사는 흔히 소유나 소속을 나타내지만 그 외에도 용도가 다양해서 국어사전을 보면 20여 가지 용도가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면 ‘의’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게 된다(‘의’가 대폭발한다고 썼다가 가치 편향 어휘라서 수정한다.). 조사 ‘의’는 긴 명사구를 만들거나 의미를 불분명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협상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각각의 참여자가 우호적인 태도로 합의를 이끌어낼 때 나타난다”라는 문장과 “가장 이상적인 협상은 참여자들이 서로 우호적인 태도로 합의를 이끌어낼 때 나타난다”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의’를 정리한 의의가 느껴진다. 또 ‘의’는 다른 조사에 붙여서 겹조사를 만들 수도 있다. “이처럼 잦은 광고에의 노출은 소비에 큰 영향을 끼친다”라는 문장을 “이처럼 잦은 광고 노출은 소비에 큰 영향을 끼친다”라는 문장과 비교해보자. 이 차이에 대해서는 <갈등하는 번역>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해야겠다. “글에서 겹조사가 남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글 쓰는 사람의 나태하고 게으른 태도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의’로 명사를 나열해 글을 쓰는 것은 편하지만, ‘~의’ 속에 담긴 의미를 풀어 명확하게 새기는 작업은 고되고 힘들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 편하면 읽는 사람이 그만큼 고생해야 한다.”

번역을 ‘언어를 바꾸는 작업’이라고 좁은 의미로만 생각한다면 번역가가 아닌 사람이 이 책을 펴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번역을 ‘대상 독자를 바꾸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있기에 번역교재에서 벗어나 좋은 글을 위한 교재가 된다. ‘특별히 잘못된 부분은 찾지 못하겠는데 왠지 모르게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글’이나 ‘재미있는 사례와 주장이 있는데도 왜 언급되었는지 모를 글’- 그러니까 좋다 말은 글이 태어나버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구상 자체가 신통치 않았을 경우인데, 이 책의 주제와는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가치 있는 구상이 안타깝게도 읽히지 않는 글이 되어버렸다면 ‘구상을 떠올린 나’라는 첫 독자를 위한 글을 ‘글을 읽는 타인’이라는 새로운 독자를 위해 전달하는 첫 번째 번역의 실패이다. 이런 실패를 피하려면 원 문화(저자의 세계)에서 괜찮게 인정받았던 구상을 재료로 해서 도착문화(독자의 세계)에서 변질되거나 살아나는 번역 과정 그 자체에 집중하여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와 다른 이, 혹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 마음 사이에 놓인 차이를 건너기 위해 글을 번역해나간다.

 

김린애 / 상쾌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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