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강솔의 도서비평] 이름이 지워진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그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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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강솔의 도서비평] 이름이 지워진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그 너머
  • 승인 2020.09.0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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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솔

강솔

mjmedi@mjmedi.com


도서비평┃디어 마이 네임

샤넬 밀러가 ‘에밀리 도’라는 이름으로 법정에서 낭독했던 최후 진술서의 마지막 문구를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영어로 된 한 단락이었는데,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게 짧고, 명확한 문장들이었다. 몇 문장 읽는데 마음이 뭉클, 눈물을 글썽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샤넬 밀러 지음, 성원 옮김, 동녘 출간
샤넬 밀러 지음, 성원 옮김,
동녘 출간

샤넬 밀러는 2015년 1월 스탠퍼드 대학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이다, 가해자 브록 터너는 현장에서 도주하다가 잡혔으나, 일년 반 동안의 재판 과정을 거쳐 6개월의 형을 받았다. 그마저도 실제적으론 3개월의 시간이었다. 목격자가 있고, 가해 사실이 명확한데도 샤넬 밀러가 만취 상태였다는 것, 가해자가 스탠퍼드 대학의 유망한 수영선수였다는 것 등이 재판 진행에서 이슈가 되었으며 브록 터너 측은, 성폭행이 아니라 그녀가 동의하는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샤넬 밀러는 신변보호를 위해 에밀리 도라는 이름으로 재판을 진행했다.

이 책은 읽기가 참 괴로웠다. 성폭행의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해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얘기들이 곳곳에 있다– 브록이 그럴 리가 없어, 술 때문에 실수 한 거야. 남학생 사교파티에 그 여자는 왜 간 거야? 그 여자는 전에도 파티에서 만취한 적이 있다면서? 전도유망한 수영선수이고 스탠퍼드 대학생인 브록의 인생이 그것으로 망쳐졌네. 우리 딸이라면 그런 파티에서 그렇게 취하도록 마시지 않았을 거야 등등. 샤넬 밀러는 법정에 나갈 때 입을 옷을 고르면서도 단정해 보이는지 고민해야했던 순간들에 대해서, 무너지는 일상에 대해서, 책상을 집 안으로 옮겨주겠다는 누군가의 호의를 무서워하는 상태에 대해서, 혼자서 길을 걸어가기 두려운 순간에 대해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상처 주게 되는 예민한 상황들에 대해서, 가까운 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에 대해서, 피부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도록 섬세하게 기록하였다. 사건 발생부터 재판의 진행과정을 기록하는 글 곳곳에 고통이 스며들어 있었다. 목소리를 높여서 말하지 않는데, 마음의 흐름과 고통이 너무나 생생하다.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그만 읽고 싶어졌다, 읽기 힘들어서.

2015년의 미국에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1990년대에 한국에서 들었던 얘기와 비슷하다. 서양과 동양, 20세기와 21세기, 공간과 시간이 다른데도 성폭행당한 여자에 대한 얘기는 별로 다르지 않다. 관습과 문화는 잘 바뀌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이차 피해를 입게 되는 사건들 중 성폭행은 단연 으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책이다.

이 사람이 술에 만취한 사람이거나, 저 사람이 장래 촉망받는 사람이거나 하는 조건들이 핵심이 아닌데도 성폭행이라는 사건을 놓고 사람들은 쉽게 말하고 상처가 덧 씌워진다. 꼭 성폭행이 아니라도 그렇다. 많은 일들은 실체로써 사실 관계와 진실보다 포장지에 의해서 평가받곤 한다. 그 포장지는 돈이기도 하고, 학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이기도 하고..여러 형태의 힘들에 의해서. 한 존재의 존엄성은 손상당한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라는 한 줄로 표현되는 시간들에는 365일이 있고 8760시간이 있고 525,600분이 있다. 매 순간들이 모여서 일 년이 되는 것이다. 고통은 매 순간들마다 느낄 수 있고, 일 년의 고통은 한번이 아니라 525600번일 수 있다.

그럼 고통 이후는 어떻게 오는가.

에밀리 도라는 이름으로 최후진술서를 작성하고, 온라인 매체에 그 글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읽고, 함께 연대하였다. 내가 몇문장 읽으며 마음이 울컥했던 일이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비슷한 일의 경험자들은 그 글을 통해 자기가 용기를 내게 되었다고 말했다. 성폭행의 현장에서 브록 터너를 쫓아가서 잡았던 두 사람의 스웨덴인을 뜻하는 <BeTheSwede>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다. 나도 스웨덴인이 되자, 어려운 이를 외면하지 말자라고. 최후 진술서를 통해 에밀리 도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은, 성폭행부터 재판과정을 힘들게 겪었던 샤넬 밀러에게 든든한 지지와 힘이 되었다. 최후진술서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연극에서 무대 배경인 풀의 역할을 맡았던 수줍은 소녀였던 사람이 고통을 겪고, 연대하는 이들을 만나고, 자신도 다른 고통에 연대하는 것. 치유이며 고발인 것. 그것이 글의 힘이다. 그렇게 고통 이후가 온다.

샤넬 밀러는 말한다.

“이 책에는 행복한 결말이 없다. 행복한 부분은, 결말 같은 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언제나 삶을 이어갈 방법을 찾을 것이기에” 라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이 구절을 들려주고 싶었다. 결말 같은 건 없다, 삶을 이어나갈 방법을 찾기에. 샤넬 밀러의 삶은 평온하지는 않을지라도 의미가 깊어졌다. 이 책이 그 증거이다.

 

강솔/ 소나무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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