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약초 기행] 1. 신이 내린 땅 <리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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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약초 기행] 1. 신이 내린 땅 <리혜선>
  • 승인 2004.10.0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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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은 연변약초 답사 첫날이다. 한창 우기여서 장마비가 내렸다. 일행은 한국 동우당 제약회사 허담 대표(대구 태을양생한의원), 한국의 저명한 본초학 학자인 신민교·정종길 교수 등 모두 8명, 오후 2시반 경에 연길에서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두만강의 가장 큰 지류인 부르하통하가 빗물에 불어 풍만한 모습으로 흘러갔다.

자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어 시작, 영금, 수확, 마침을 알려주고, 해와 달이 있어 낮과 밤, 일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알려준다. 자연이 만든 인간이기에 우리의 생리에도 계절이 있고 해와 달이 있는 것이다. 자연을 어기면 벌을 받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혹사했다는 느낌이 생긴 것은 작년부터이다.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자연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만나리라 결심하고 등산계획을 세웠다. 결심이 앞선 것인지 인연이 앞선 것인지, 한국 동우당 제약회사의 약초 답사길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연변에 대한 답사는 이번까지 크게 세 번이 된다. 1989년 여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문물 고찰단의 일원으로 답사 길에 오른 적이 있다. 연변 곳곳에 숨쉬고 있는 고구려, 발해의 유적들, 지금은 분토로 남은 그 찬란한 역사를 한줌의 흙에서 느끼며 진한 감동을 느꼈다.

1991년 겨울에는 문인친구들과 함께 조선족의 중국 입주노선을 따라 답사하면서 한인(韓人)으로부터 중국 조선족이 된 우리의 백여 년 역사를 취재했다. 이번에는 약초답사, 이 땅의 숨결을 또 다른 측면에서 느껴보게 되는 것이다.

연변은 삼림이 많고 고산준령이 많은 등 지리, 지형, 그리고 독특한 기후 조건 때문에 약초가 많이 난다. 특히 산 고도에 따른 기후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침·활엽수림대(樹林帶), 침엽수림대, 사스래림대, 고산 툰드라대가 뚜렷이 분포돼있어 한 산맥에서 동시에 여러 기후조건의 식물이 자란다. 그야말로 보기에 흔치 않은 독특한 식물의 왕국이다.

‘길림성개요’에 의하면 장백산에는 1천여 종 이상의 약용식물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인삼, 당삼, 동충하초, 황기, 평패모, 세신, 천마, 북오미자, 동북 자인삼, 목통, 두향, 장백 서향, 원호, 천산룡, 방풍, 위령선, 선황련 등 진귀한 약재가 많이 난다. 야산삼, 목령지, 불로초, 북기 등은 장백산 외에는 얻기 힘든 약초이다. 장백산에는 또 300여종의 동물이 살고 있어 동물약재도 많이 난다. 그중 녹용, 호골, 녹태, 녹변, 사향, 웅담, 오소리기름, 하마유 등 모두가 진귀한 약재들이다.

중국에서 ‘관동 3보(關東三寶)’라고 일컬어지는 인삼, 돈피, 녹용은 모두 백두산 특산물이다. 1980년에 유엔은 백두산을 세계인류생물권 보호구로 정하고 세계자연 보류지의 하나로 인정했다.

연변은 개발역사가 100여 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불분이확(不糞而穫)’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비료를 치지 않아도 수확되는 살찐 땅이다. 이 땅이 특별히 비옥한 까닭은 청 정부에 의해 200여년간 봉금돼 있었기 때문이다.

건륭 황제는 ‘성경(심양), 길림은 본조 용흥지지(本朝龍興之地)’라고 말한 바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59년에 발바닥에 일곱 개의 붉은 기미가 있다는 청나라 제1황제 누르하치가 심양 지역인 요령 신빈현에서 태어났다.

회령군 오지암전설(‘지명유래’, 한국출판)에는 누르하치가 북한 회령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져있다. 누르하치는 지금의 심양 일대, 송화강 유역과 연변, 러시아의 일부 지역을 누비며 여진족을 통일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대명강산을 정복해 청나라를 세웠다.

1677년에 청 정부는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이북 천여 리를 청조발상지로 정하고 봉금 정책을 실시했다. 산삼산, 위렵산, 포주하를 정하고 인삼을 망라한 귀중한 약초와 진주, 그리고 돈피, 사슴, 표범, 범, 곰 등은 관리를 파견해 왕궁에 바치게 했다.

어명을 받고 약초를 캐고 수렵을 하고 포주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관리하는 병졸과 관리들만이 주거할 수 있어 인가가 적었다. 기록에 따르면 강희년간에 성경(요령 심양지역), 길림(연변 포함) 지방의 1만여명 기병들이 봉금지 내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였다고 한다.

강희, 함풍년에는 사람을 파견하여 순회, 감시하였고, 도광年間에는 해마다 통순(通巡)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여러 곳의 관병들을 데리고 순시하게 했다.
일단 사사로이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을 발견하기만 하면 즉시 죽이거나 몰아내고 집을 허물어버리고 농작물을 짓밟았다. 연길 도심을 가로지르는 부르하통하도 포주하(捕珠河)여서 왕궁에 바칠 진주를 캐던 강이라고 한다.

그 때 이 땅에 대한 전설은 ‘조 이삭은 허리띠만큼 길고, 감자는 물동이만큼 크고, 콩알은 열콩알 만큼하고, 옥수수이삭은 팔뚝 만큼하고, 호박은 쪽지게에 지도록 크고, 콩대는 지팡이를 만들만큼 굵고…’(‘두만강의 충청도 아리랑’)라는 것이었다.

1869년 기사년을 전후하여 엄중한 水災, 旱災에 시달리던 한민(韓民)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이 땅에 밀려들었다. 200여 년이나 살찌기만 하고 비어 있던 땅, 그야말로 신이 유독 우리 민족에게 내린 땅이다. 대신 우리는 중국 조선족이 되어갔다. 이를 가리켜 숙명이라고 하리라. 월강령이란 무서운 형벌이 있었음에도 기민(饑民)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인접한 짜리 로씨야의 침범이 잦아지자 청 정부는 연변지구 변방을 강화하기 위해 1885년에 두만강 이북 7백리 길이, 40~50리 너비를 ‘한민수납지지(韓民收納之地)’로 정하고 개간을 허락했다. 9년 뒤 1894년에 나의 증조부님은 한 살이 된 나의 조부님을 업고 조국을 등진 채 살길을 찾아 낯설은 이 땅에 들어서게 되었다.

동북의 광활한 평원은 우리 조선족에 의해 수전(水田)으로 개발되었다. 입쌀이 유명해서 연변의 일부 논밭은 만주국 시기에 강덕 황제의 어전으로 되였다. 지금도 연변입쌀은 중국에서 유명하다. 땅이 비옥하니 약초를 망라한 이 땅의 모든 것이 기름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계속>

필 자 약 력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48세)
△연변대 漢語학부 졸
△연변일보,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겸 소설창작위원회 위원
△장편 ‘빨간 그림자’ ‘紅胡蝶’ 등 작품집 8권

■ 협찬 : 옴니허브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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