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 香付子가 端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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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 香付子가 端緖
  • 승인 2020.11.14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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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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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27

 

이 사진자료를 ‘향부자팔물탕 처방전’이라고 부르겠다.

 

(1) 추리

이것은, 나의 추리(推理)이다.

최린(崔麟)이 스물한 살이던 1898년에 함흥의 보원국(保元局)에서 예순둘이던 동무(東武) 공(公)을 처음 만났던 날에 최린은 香付子八物湯(향부자팔물탕)이라고 적힌 처방전을 받는다. 그리고 그 약을 먹고 병이 나았다. 이후에 종종 동무 공 문하에 출입하였고, 동무 공이 작고한 후인 1903년에는 고향 친구인 한석교(韓錫敎)의 집에 가서 『동의수세보원』을 연구하면서 필사(筆寫)도 하였다. 최린은 자신이 필사한 〈동의수세보원〉 안에 처방전을 넣어 두었다.

최린은 1910년에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했고,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가 서거한 1922년 이후에는 실질적인 후계자로 활동했다.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1949년 4월 20일 이후에 그의 삶을 정리하고자 약력(略歷)이란 제목으로 원고를 집필했다. 그의 나이 일흔둘이었다. 이 원고에는 1878년 출생부터 49세가 되던 1926년에 세계유람에 나서던 때까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 원고를 제자인 군암(君菴) 이우영(李宇英)에게 맡겼다. 이우영은 이 원고를 천도교가 관여하는 잡지에 실을 생각이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0년 7월 14일에 최린은 납북되었다. 그리고 195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최린이 남긴 유품은 아들인 최혁(崔赫)이 보관하였다.

1962년에 천도교 관련 학술잡지인 『한국사상(韓國思想)』 편집자는 당시에 천도교 종무원장(宗務院長)이던 이우영이 소장하고 있던 최린의 원고를 「自敍傳」이란 제목으로, 동년 8월에 나온 제4호에 싣는다. “3.1運動史를 새로운 視覺에서 硏究하여야 한다는 史學界의 動向에” 좋은 사적(史的) 자료로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원고의 내용에서 맞춤법만 교정하고 원문을 그대로 실었다.

“~ 비로소 少陰人으로 判定하시고 左와 같이 處方과 訓話를 卽席에서 先生이 부르시고 내가 받아쓰고 하였다. 香附子八物湯 香附子 白何首烏 各二錢(白何首烏或以人蔘代之) ~”

『한국사상』 편집자와 군암 이우영은 향부자팔물탕 처방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설사 처방전에 대해 알았다고 하여도 그건 관심 밖이었다. 그들의 지향은 ‘3.1운동’이었다.

여암선생문집편찬위원회에서 최린이 남긴 글과 관련 기록을 묶어서 1971년 7월 14일에, 상하 두 권으로 『여암문집(如菴文集)』을 발간한다. 편찬위원장은 주동림(朱東林), 편집위원장은 이응진(李應辰)이었다. 한의사였던 주동림은 향부자팔물탕 처방전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최린이 부기해 둔 “右東武親書 傅余者也” 그대로 처방전의 내용 전부를 동무 공이 친히 썼다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한국사상』의 내용 중에서 아래 부분과 같이 수정하도록 편집진에게 권고했다.

“~ 비로소 少陰人으로 判定하시고 다음과 같이 처방과 훈화를 즉석에서 선생이 친히 쓰시어 나에게 주시었다. 香付子八物湯 香付子 白何首烏 各二錢(白何首烏 或以人蔘代之) ~”

 

(2) 『한국사상』과 『여암문집』의 비교

『한국사상』과 『여암문집』의 내용에서 다른 점을 비교해 보자.

卽席에서 先生이 부르시고 내가 받아쓰고 하였다. 香附子八物湯 香附子 『한국사상』

즉석에서 선생이 친히 쓰시어 나에게 주시었다. 香付子八物湯 香付子 『여암문집』

처방전의 글씨를 쓴 주체가 『한국사상』에서는 최린이고, 『여암문집』에서는 동무 공이다. 그리고 하나 더 『여암문집』에서는 처방전에 쓴 글자를 따라 향부자를 香付子로 표기했다는 점이다. 주동림은 한의사이므로 香付子에서 부(付)자가 오기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것이 동무 공이 평소에 香付子라고 쓰는 습관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최린은 한방의학을 연구한 적이 있으므로 약력 원고를 쓸 때, 처방전에는 香付子로 되어 있었지만 향부자(香附子)로 교정하여 썼던 것이다.

 

(3) 최린의 필체

나는 뭐 필적(筆跡) 감정사는 아니다.

최린은 평소에 ‘양주군(楊洲郡) 구리면(九里面) 옥봉산(玉鳳山) 금란각(金蘭閣)’에서 자주 수도(修道)하곤 했는데, 기도할 때마다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한 권씩 필사해서 신임하는 제자들에게 선물1)하곤 했다. 필사한 자료가 영인(影印)되어 『여암문집』 상권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러니까 최린의 필체를 검증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또, 향부자팔물탕 처방전에 있는 훈화(訓話) 부분을 처방전과 다른 필체로 필사한 자료도 『여암문집』 상권에 남아 있다.2) 그것은 면지(面紙)로 앞뒤 표지 안쪽에 들어가 있다. 『여암문집』의 편집자는 “面紙는 先生이 筆寫한 東醫壽世保元에 써 넣어준 東武 李濟馬 先生 筆跡”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좀 오해가 있다. 그런 오해는 말미에 붙은 부기(附記)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오해는 주동림에게서 유래한다고 짐작한다.

나는 최린이 스스로 경계(警戒)하기 위해서 이 부분도 자주 필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필사한 것을 동의수세보원 안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주동림과 『여암문집』의 편집자는 오해했지만 면지에 들어간 것은 최린의 필체가 확실하다고 판단한다.

 

(4) 모두 전

모두 전(全), 이 글자는 들 입(入) 밑에 임금 왕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사람 인(人)으로 써 버릇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습관은 한번 굳어지면 잘 고쳐지지 않는다. 글을 쓰다가 무심결에 그냥 나오게 된다. ‘

향부자팔물탕 처방전의 훈화 부분에 ‘모두 전’이 나온다. 나는 이 글자에 주목했다. 그리고 물론 면지의 것도 확인했다. 두 곳 모두 사람 인으로 쓰여 있다. 이것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처방전의 훈화 부분은 최린이 쓴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리고 부기된 부분인 “右東武親書 傅余者也”는 처방전과 면지의 필체가 완전히 동일하므로 나의 추측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5) 락과 약

면지와 처방전의 훈화 부분을 쓴 사람은 최린이 맞다고 본다.

그럼 이번에는 처방전에서 향부자팔물탕 처방 내용과 훈화 부분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처방전을 얼핏 보면 처방 부분의 글씨는 거침이 없어 보이고, 훈화 부분은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인다. 다른 사람이 쓴 글씨 같다는 것이다.

 비교해 볼 재료는 즐길 락(樂)과 약 약(藥)이다.

 

최린이 동경대전을 필사한 곳에서 즐길 락을 찾았고, 그것을 처방전의 훈화 부분에 있는 글자와 우선 비교하였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동경대전 필사본에 ‘약 약’이 있다. 동경대전을 필사한 필체로 보면 즐길 락과 약 약이 어떻게 써졌고, 같은 사람이 쓴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동경대전의 藥과 처방전 처방 부분의 藥을 비교하면 크게 두 가지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풀 초(艸) 변을 쓰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 목의 처리다. 동경대전에서는 나무 목의 세로 획을 삐쳐 쓰지 않았는데, 처방 부분에서는 삐쳐서 썼다.

이상의 이유와 추리를 통해서 나는 향부자팔물탕 처방전의 처방 부분은 동무 공이 직접 쓴(親書) 필체라고 믿는다.

 

※ 참고 문헌

1) 『韓國思想』 4집 한국사상강좌편집위원회 1962. 8.

2) 『如菴文集/上』 여암선생문집편찬위원회 1971. 7. 14.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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