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宗損益 발문과 醫宗損益附餘 서문의 연속성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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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宗損益 발문과 醫宗損益附餘 서문의 연속성에 대한 고찰
  • 승인 2020.11.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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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mjmedi@mjmedi.com


임상 한의사 3인이 연구한 황도순, 황도연(70)

Ⅰ. 서론

민족의학신문 1220호에서는 <醫宗損益>의 編制 비교를 통해 간행 시기를 살펴보았는데 초기본에는 惠庵의 跋文이 없고 후기본에는 발문이 있음을 밝혔다. 발문의 匡郭을 자세히 살펴보면 上下匡郭에 틈새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발문을 補刻한 것이 후기본임을 알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醫宗損益> 발문과 <醫宗損益附餘> 서문의 유사한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惠庵의 서술방식에 대한 연속성을 논술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醫宗損益> 발문

<醫宗損益>1) 발문 일부와 필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因述長歌, 以嘲以解, 歌曰, 我本早孤人, 生無强近親. 家計又不贍, 一炊到三旬. 幸有老母在, 僅僅托此身. 風霜飽已盡, 奚論艱與辛. 所愧爲人子, 甘旨薦無因. 如何先師訓, 憂道不憂貧. 乃知詩·書·禮, 不及錢一緡. 已矣吾何執, 改舊而圖新. 十五廢擧業, 十六學黃神. 士農與工商, 古今之四民. 與其墜先訓, 是乃術中仁.(···이 때문에 긴 노래를 지어서 읊조리고 해명한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나는 본래 일찍이 의지할 곳 없는 고아가 되었고, 살면서 아주 가까운 친척도 없었네. 가계 또한 넉넉하지 않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밥을 하였네. 다행히 노모가 살아계셔서 근근이 이 몸을 의탁하였네. 풍상에도 배부른 적 없었으니 어찌 가난과 고초를 논하리. 부끄러운 것은 자식이 된 도리로 맛있는 음식을 받들 방법이 없는 것이었네. 어떠하랴? 선사의 가르침이 도 닦는 것을 근심하지 가난을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이에 시·서·예를 알아도 돈 한 꾸러미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네. 나의 어떠한 집착을 그만두고, 옛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였지. 15세에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16세에 황제내경을 공부했네. 사농공상은 고금의 네 가지 백성의 신분이네. 선현의 가르침을 땅에 떨어뜨리기보다는 바로 인술(의술)을 행하는 일이 적합할 것이네.)

2. <醫宗損益附餘> 서문

<醫宗損益附餘>2) 서문 일부와 필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그림 1).

그림 1. <醫宗損益附餘>의 서문

 

士之有功於世也, 得志澤及萬姓, 不得志維持風化. 若夫性命之言, 經濟之文, 抑又其次, 而亦非俗學, 所可僥倖而取名者也. 噫吾家世業擧不中, 寄跡京鄕, 常患自治之不可, 而孤負四者之功 亦已多矣. 然旣無其功, 又無其心則, 將何以見於世乎. 竊謂道脈之外, 能助强大之形, 刑政之外, 有俾生成之德者, 苟非醫藥之書, 亦無以洩其自盡之心矣. 是用寄意此中, 聊欲壽世.(선비가 세상에 功을 세움에 뜻을 두고 있음에 뜻을 얻으면 은택이 만백성에게 미치고, 뜻을 얻지 못하면 風化(도덕규범)를 유지한다. 저 性命의 말과 經世濟民의 글 같은 것은 또 그다음 일이어서 역시 俗學은 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요행히 이름을 얻은 것이다. 아 우리 집안은 대대로 과거를 준비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京鄕에 몸을 의탁함에 항상 스스로 다스림에 여가가 없음을 근심하였고, 네 가지(得志, 不得志. 性命之言, 經濟之文) 공부를 져 버린 것이 역시 이미 많다. 그러나 이미 그 공이 없는데 또 그 마음조차 없다면 장차 어떻게 세상에 드러내겠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道脈 외에도 능히 강대한 모습을 도울 수 있고 政刑(政令과 刑罰) 외에도 만물을 생성시키는 덕에 가까운 것이 있으니, 진실로 의약서가 아니었으면 또한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가운데에 뜻을 기탁하여 애오라지 세상을 복되게 하고자 한다.)

 

Ⅲ. 고찰

<醫宗損益> 발문과 <醫宗損益附餘> 서문에 유사한 내용 가운데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구체적으로 科擧를 대신하여 의술을 공부했다는 점이다. 비슷한 내용은 <醫宗損益> 서문에도 있으니 “余潛玩于素問難經及古今醫學者積四十禩矣. 迺敢刪繁補闕爲若干卷.(내가 <素問>과 <難經> 및 고금 의학에 마음을 기울여 연구한 것이 40년이 되었다. 이에 감히 번거로운 내용은 줄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몇 권의 책을 편찬하게 되었다.)”라고 나오는데 <醫宗損益> 발문과 <醫宗損益附餘> 서문의 내용과 상통한다.

노대환3)은 黃泌秀에 대하여 “황필수 직계는 과거 진출에는 실패하였지만, 한동안 사족으로서의 면모는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7대조 黃鏋과 그의 두 형 鍵, 鍍이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했던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황도연 대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매우 쇠락하였다. 그런 이유로 황도연은 사족 가문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진로를 바꾸어 의약 분야에 종사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대환이 말한 “7대조 黃鏋”과 “사족 가문의 후손” 부분은 1958년에 간행된 戊戌譜 <昌原黃氏世譜>를 참고로 한 것인데 이는 投託한 족보를 참고한 것으로 惠庵 후손의 족보 投託은 필자가 이미 민족의학신문(2019.8.15.자 참조)에서 밝힌 바와 같다. 다만 “진로를 바꾸어 의약 분야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이다.

그런데 <醫宗損益> 서문에서는 단순히 “의학을 연구한 것이 40년이 되었다”라고 했는데 <醫宗損益附餘> 서문에서는 “우리 집안은 대대로 과거를 준비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을까? <醫宗損益> 초기본에서는 고아였다거나 15세에 과거 공부를 접고 16세에 의학을 공부하였다는 내용의 발문이 없는데 후기본에는 補刻되었다. 이미 발문이 삽입된 판본이 세상에 많이 유통되는 상황에서 <醫宗損益附餘>에서 부정하거나 취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추측건대 惠庵은 御醫로 성공한 후 노년에 인생을 반추하면서 본인의 어려웠던 시기도 향후 저술할 <醫宗損益附餘>에서는 당당하게 발문이 아니라 서문에 서술하리라 하는 마음을 이미 <醫宗損益> 발문을 삽입할 때부터 먹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惠庵이 사망한 후 출간된 遺稿인 <重訂方藥合編> 標題에 있는 渼隱의 識文에는 “吾師乎惠庵公 以名門宿德出(나는 惠庵公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公께서는 名門家의 덕망 있는 집안 출신이셨다)”라고 나오는데 이는 渼隱이 惠庵의 솔직한 품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헛되이 과장하여 추앙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향후 <醫宗損益>이나 <醫宗損益附餘>에 나타난 惠庵의 思惟에 대한 진전된 연구 결과를 기대한다.

 

Ⅳ. 결론

<醫宗損益> 발문과 <醫宗損益附餘> 서문 내용의 연속성에 관해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다.

1. <醫宗損益> 발문과 <醫宗損益附餘> 서문에는 科擧를 대신하여 의술을 공부했다는 점이 공통으로 나온다.

2. 발문이 삽입된 <醫宗損益>은 <醫宗損益附餘>로 발문과 서문의 맥락이 연속되므로 발문이 있는 <醫宗損益>은 후기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惠庵, 醫宗損益, 필자 소장.

2. 惠庵, 醫宗損益附餘, 필자 소장.

3. 노대환, 愼村 黃泌秀(1842~1914)의 사상적 행보, 한국학연구, 2015:37:479-508.

* 번역에 도움을 주신 곽해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기춘·서정철·최순화 / mc맥한의원·우리경희한의원·보광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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