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근본치료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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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근본치료가 어디에
  • 승인 2021.01.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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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린애

김린애

mjmedi@mjmedi.com


도서비평┃아픔이 길이 되려면


“원장님, 치료받아도 몇 달 있으면 다시 아픈데 어떡해요? 근본치료 없어요?”

“아플 때 치료받고 안 아플 때 운동하고 계속 스트레칭 하셔야죠. 살도 좀 빼시면 좋고요. 올해 체중 조금 느신 거 같은데요.”

“에이 그게 쉬운가요. 맘대로 안 되죠. 일도 해야 하고 바쁜데..”

“그러네요. 일하시느라 아프시네. 그럼 퇴사가 답인가 보네요.”

 

김승섭 지음, 동아시아 출간

자주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퇴사가 근본치료인 게 아닐까, 자주 생각하곤 한다. 앉아서 일하는 분들은 허리가 아프고 목이 아프고 교대근무로 일하시는 분들은 수면 불량과 면역질환으로 괴롭다. 업무 압박이 심하신 분 중엔 상체에 열감이 나며 긁으면 가렵고 발개진다는 피부묘기증 환자를 많이 뵌다. 과연 아픔은 각자가 만들고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걸까? 혹은 진료실에서 드는 이런 소소한 생각을 사회단위로 바라보고 풀어낸 책이 있다. 보건학자 김승섭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다.

 

“차별 받아서 아프다”

노동자 4천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구직과정에서 차별받았는지, 차별에 따라 건강 상태는 어떤지 조사했다. 차별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람보다 건강위험비가 두드러지게 높았다.

 

“아픔을 말하지 못해서 아프다”

위의 연구에서 차별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지 않고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연령, 학력, 성별 등을 바탕으로 차별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눈다. 그러면 차별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면서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대답한 사람, 차별 경험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차별이 없었다’고 대답한 사람의 2배, ‘차별이 있었다’고 대답한 사람의 1.25배가량 더 건강위험이 높았다.

또 학교폭력 피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학교폭력 경험을 알리지 못한 남녀 아이들은 모두 학교폭력을 당하지 않은 아이들의 7~8배, 폭력을 당했지만 주변에 알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들의 2~3배 우울증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특히 폭력을 당했지만 자신은 별다른 생각 없었다고 말한 남자아이들(힘들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가장 압력을 크게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그룹)이 가장 위험한 수준으로 우울 증상을 보였다.

 

“위험해서 아프다.”

1995년 시카고에서 폭염이 발생했고 경계를 맞대고 있는 두 지역, 론데일 북부와 남부에서 폭염사망 발생률을 조사했다. 지리적 여건, 경제적 여건, 인종, 연령 등 모든 면에서 유사한 두 지역 중 북부에서는 10만 명당 40명, 남부에서는 10만 명당 4명의 사망이 발생했다. 두 지역의 차이는 치안이었다. 불안한 치안으로 사람들은 외출을 꺼렸고, 서로의 위급상황에 개입하기도 꺼렸다. 비슷한 폭염이 4년 뒤에 찾아왔을 때 시 정부는 무더위피난처로 갈 버스를 제공하고 공무원의 가정방문으로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시카고의 폭염 사망은 95년 700명에서 99년 110명으로 감소했다.

 

“가난해서 아프다”

부신은 스트레스에 적응하기 위한 호르몬 코르티솔을 분비하는 기관이며, 이 부신이 작아지는 ‘특발성 부신 위축증’은 고소득계층에게 자주 발생하는 질환으로 1930년에 보고되었다. 그런데 실존하는 질환이 아니다.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시신이 연구대상이었다. 그래서 스트레스의 영향으로 커진 부신만 당시 연구자들이 볼 수 있었다. 이러니 정상 부신은 위축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책은 정리해고 된 노동자, 소방공무원, 성적 소수자 같은 다양한 사회의 아픔이 사람의 아픔으로 이어진 사례들을 알기 쉽게 그러나 마음이 불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사회의 아픔과 나의 일상에서 보는 허리 통증이며 수면 불량 같은 문제들의 무게는 달리 보인다. 하지만 단절된 문제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오래 앉아있어서 허리가 아프듯 외로워서 아프고 위험해서 아프다. 아파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해야 하는 세상이어서는 안 된다. 사람도 사회도 치료가 필요하다.

저자인 김승섭 교수님은 자신이 임상 의사로 살면 수련 과정에서 여러 활동과 단절되어 살아가고, 그런 후 매일 비슷한 환자를 보며 산다면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임상의도 있지만 자신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건학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임상의”일까. 적어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로마서 12장 15절)을 따르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한다.

 

김린애 / 상쾌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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