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 金容俊과 普及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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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 金容俊과 普及書館
  • 승인 2021.03.13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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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壽世保元〉 들춰 보기_15

한민족은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조선시대 前期까지도 책을 만드는 일은 국가의 事務1)였다. 고려 때의 금속활자나 조선의 금속활자나 모두 經書나 국가의 지배이념을 전파하는 책을 찍을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閭閻을 위한 책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선 중기까지도 민간에는 서점(書肆)이 없었다. 中宗 때 와서 비로소 1519년(己卯年)에, 중국처럼 書肆를 만들려는 방안(節目)을 마련했으나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간에서 원하던 책은 筆寫를 통해서 유통되었다. 필사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인2)이 생기고 그것을 유통하는 사람3)도 생겼다. 그러다가 주로 민간에서 木板으로 인쇄한, 즉 坊刻本 서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 중후기에는 서점도 생겼다. 하지만 중국 北京의 경우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책을 빌려주는 貰冊店은 조선 후기에 성행했다.

1883년에 개화파인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에서 근대식 활판인쇄술을 도입했다. 최초의 민영출판사는 1884년에 세워진 廣印社이다. 광인사 이후에 1905년까지 출판물을 발행한 곳은 塔印社, 廣文社, 博文社 등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서점은 1896년에 金基鉉이 설립한 大東書市이다.

 

(1) 金容俊

김용준은 1883년(癸未年) 9월 10일생이다. 本貫은 光山이다. 어려서 漢文을 배웠다. 종교는 儒敎이다.4) 보급서관은 1908년부터 김용준이 大韓書林을 인수하여 시작한 출판서적상5)이다. 대한서림은 1908년에 이해조의 『驅魔劒』 초판을 발행6)한 출판사로 잘 알려진 출판사이다. 김용준은 1910년 9월 2일7)에 ‘漢城 北部 小安洞 16通 8號’에 보급서관을 開業하여 1914년까지 본격적인 출판활동을 하였다. 소설책 전문 출판사로 활약하다가 1914년 5월을 끝으로 보급서관의 출판활동은 종료되었다. 약 26종을 출판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이해조8)의 신소설 『화의 혈』, 『월하가인』, 『옥중화』, 『누구의 죄』 등이 있다. 이후에 김용준은 자신이 소유한 발행권을 가지고 다른 출판사를 통해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9)

특기할 점은 김용준이 당시의 출판대세였던 신소설 뿐 아니라 〈壽世保元〉을 발간했다는 사실이다. 김용준은 1913년과 1914년에는 보급서관 이름으로, 1921년에는 博文書館 명의로 京城에서 〈수세보원〉을 발간했다. 이것이 각각 『東醫壽世保元』의 3版, 4版, 5版10)이다. 특히 4판에는 韓敎淵의 序文이 들어가 있다.

 

(2) 普及書館

 그동안 한의학계(그리고 사상의학계)에서는 김용준과 보급서관에 대해서 관심이 부족했다. 이와 관련한 연구나 저술은 거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정리한 ‘근대초기 출판사에 관한 자료’에서도 보급서관이 〈수세보원〉을 발행한 것은 다루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근대 초기의 출판사나 출판업자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보급서관과 관련한 記事를 검색해 보았다.

『漢城新聞』 1910년 8월 30일자에 보급서관 개업 광고가 있다. 이 광고는 9월 11일까지 한 단짜리 광고로 쭉 이어졌다.11)

“본 서관에서 일반 교육계에 공익을 보급하기 위하여 소안동 16통 8호에 서관을 신설하고 동서양 고금 서적과 교과용 각종 도서와 학교 及 학도용 제반 물품을 일신 비치하고 염가로 신속 편리하게 酬應함을 주의하여 9월 2일에 개업하오니 경향 각 서포와 각 학교 學員 及 직원 僉彥은 隨宜 청구하심을 懋望. 단 지방에 재하여 대금을 직접으로 辦交치 못하는 경우에는 引換으로 相交함. 한성 북부 소안동 16통 8호 보급서관 주인 김용준 白”

『每日申報』 1911년 1월 18일과 11월 19일자에 보급서관의 광고가 있고, 11월 20일자에는 書籍縱覽所를 설립했다는 기사가 있다.

“北部 小安洞 보급서관 주인 金容俊 씨는, 일반 학생의 독서력을 증진케 하기 위하여 서책 300여 종을 수집하여 그 보급서관 내에 학생서적종람소를 설립하고, 매일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무료로 縱覽케 한다더라.”

서적종람소12)는 書鋪가 운영하던 사설도서관이다. 1912년 12월 6일에는 상점평판기가 실리는데 다분히 광고적인 성격을 띤 기사이다.

1921년 10월 26일에는 『동아일보』에 博文書館의 광고로 『동의수세보원』을 소개하고 있다. 이 당시에 신문 광고의 많은 부분을 출판사 광고가 차지하고 있었다.

근대 초기 출판사의 사진을, 2008년에 남석순 교수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新文界』에 수록되어 있던 것을 찾아냈다. 『新文界』는 월간 잡지로 지식인을 대상으로 1913년 4월부터 1917년 3월까지 총 48호가 발행된 친일잡지이다. 이 잡지에서 유명 출판서적상을 소개하면서 사진을 실었는데, 그 사진들 앞에 동일한 입간판이 등장한다. ‘新文界學生肆’이다. 월간 『新文界』의 지정판매처라는 뜻이다.

 

(3) 〈壽世保元〉과 김용준

김용준은 왜 〈수세보원〉을 펴냈던 것일까. 단순하게 짐작해 보자. 시중에 수요가 있으니 판매가 보장된다. 그리고 저작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1901년에 初版이 그리고 1911년에 발간된 再版이 있었으니, 새로 판을 짜는 일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용준이 한교연을 찾아와서 서문을 부탁했다면, 김용준에게 〈수세보원〉을 출판하도록 권고한 사람이 한교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교연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 중 重版을 내었고 이 책을 항상 옆에 놓고 읽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니, 이 책이 장차 온 세계에 널리 보급되리라는 것쯤은 굳이 혜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13)

이렇게 설득하면서 권고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김용준은 3版을 내고 4판을 꾸미고 나서, 문득 무엇인가 부족한 기분이 들어서 급히 한교연을 찾아갔던 것이다.

“보급서관의 김용준 사장이 ~ 이미 책을 다 꾸며 놓은 후에 나를 찾아와서는 내가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라났으므로 내가 검정을 하고 서문을 써야 한다고 말하였다.”14)

책의 출판과 직접 관계된 사람이 아닌 사람이 쓴 서문이란 보통 부풀려지고 潤色되기 마련이다. 한교연은 서문을 쓴 일이 “분수에 넘치는 행동(僭妄)”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의 글을 통해서 行間에 숨겨졌던 일을 조금이나마 類推해볼 수 있었다.

韓敎淵은 1868(戊辰年)년생으로 韓駿鉉(1837~1919)의 아들이다. 한준현은 韓龜鉉, 韓象鉉 兄弟와는 6촌 사이이다. 한구현의 아들은 韓稷淵이고, 한상현의 아들은 韓昌淵이니 두 사람은 4촌이다. 한직연과 한창연은 〈壽世保元〉 初版을 발간한 栗洞契 門人이다. 그러니 한교연으로 보면 한직연, 한창연은 8촌이 된다. 한직연의 아들로 韓秉武와 韓秉道가 있는데 한병무는 1936년 12월에 북경에서 〈壽世保元〉 6版을 발행했고, 한병도는 韓雪野란 筆名을 쓴 作家다.

 

※ 참고문헌 및 자료

1) 이덕일, 국가의 책과 민간의 책 『서평문화』 2008년 가을호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2) 남석순, 『근대소설의 형성과 출판의 수용미학』 도서출판박이정 2008. 6. 27.

3)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https://www.nl.go.kr/NL/contents/N20103000000.do

4) 반거들충이 한무릎공부 https://blog.naver.com/bookgram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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