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東武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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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東武遺稿〉
  • 승인 2021.03.27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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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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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世保元〉 들춰 보기_16

(1) 李能和

東武遺稿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된 것은 1918(大正 7)에 나온 이능화1)朝鮮佛敎通史 下篇2)이다. 여기에서 그는 東武 公의 저술로 東武遺稿, 格致考, 東醫壽世保元을 소개하였다.3) 이능화가 열거한 것을 동무 공의 저술 순서로 오해한 연구자도 있다. 언뜻 보면 그렇다. 수세보원은 동무 공 生涯의 마지막 저술이고, 1918년 당시에 이미 출간되어 세상에 나와 있던 유일한 저작이다. 그리고 수세보원이전에 1880년부터 시작한 儒略, 獨行篇, 反誠箴으로 이어지는 격치고의 저술이 1893년에 완성되었다. 이능화는 이것도 완결된 저술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 남겨진 원고를 동무유고라고 한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4) 그러니까 그는 격치고수세보원와 대등하게 중요한 저술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이능화는 1934년에 나온 朝鮮名人傳5)東武公傳을 싣기도 했다. 이 글에 다소 不分明한 내용도 많이 섞여 있지만 동무 공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글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6) 동무 공이 자신의 집7)에 머물며 수세보원을 집필하던 시기에, 20대의 이능화는 곁에서 직접 동무 공을 겪어 본 사람이다. 그런 생생한 경험은 존중해야 한다.

그런 후에 東武遺稿는 한동안 이능화의 기록을 넘어서지 못했다. 물론 이후에 東武遺稿라는 이름이 아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출판사 관계자, 사상의학 임상가, 연구자 중 일부는 이것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東武遺稿필사본 實物에 대하여 기록한 자료는 없었다.

 

(2) 북쪽과 남쪽

현재까지 세상에 드러난 東武遺稿는 두 종류가 있다. 먼저, 19667월에 북한 보건성의 동의간부양성소 사상반에서 謄寫版으로 간행한 것이 있다. 이것을 保健省本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1999년에 량병무(1935~ )와 차광석(1971~ )이 번역한 책이 해동의학사에서 간행한 국역 한의학대계8)에 15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책의 解題는 비교적 단출하다. 1966년에 保健省本이 성립했던 과정에 대한 소개가 전혀 없다. 아마도 底本이 된 자료에 번역자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 자체가 실려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남쪽에서는 1995년에 朴允熹 원장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9) 藏書閣하성문고목록10)에서 東武遺稿를 발견하였다. 이것을 藏書閣本이라고 부른다. 어렵게 도서관장의 허가를 받아 복사를 했고 박윤희 원장이 디지털텍스트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이 자료를 반영하여 석사학위 논문11)을 썼던 이창일이 譯註를 하여, 199911월에 청계출판사에서 발간했다.12)

북쪽과 남쪽의 번역본에 각각 저본이 된 두 筆寫 자료가 같은 이름으로 東武遺稿라고 불리지만, 보건성본장서각본은 서로 다른 書物이다.

 

(3) 東武自註

東武遺稿두 자료에 모두 들어 있는 내용이 있다. 이른바 性命論 東武自註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壽世保元의 첫 논편인 性命論條文 1, 天機有四註解한 것이다. 이것이 정말 東武 공이 직접 쓴 주해인지에 관해서는 그동안 학계에서 여러 견해가 있었다. 나는 이것이 東武自註라고 믿는다.13) 동무 공은 素問5 陰陽應象大論篇에 있는 내용14)을 끌어다가, 자신의 방식으로 비틀어서 地方 人倫世會 天時對比하여 설명하고 있다. 天機西...方位機微라는 것이다.

보건성본장서각본에 모두 있는 東武自註가 같은 내용이라는 소개만 믿고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겼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책이 저본으로 삼은 두 筆寫本의 해당 내용은 똑같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韓東錫東醫壽世保元註釋15)에 실어놓은 내용도 동일하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준비하면서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나온 번역본을 보다가 발견했다.

장서각본을 텍스트로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긴 것이다.

 

(4) 디지털 加筆

나는 李璟城 원장이 2000424일에 완성한 [檢索本 東武李濟馬先生 全體 原文資料]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장서각본부분은 19972월에 경희한의대 사상의학교실에서 정리한 것이다.17) 사상의학교실에서는 텍스트 작업 후에 飜譯도 진행하였는데 이 번역본을 김백희18)가 후배인 이창일에게 소개하였고, 이창일은 그 자료가 역주 작업에서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19)

아래는 경희한의대 사상의학교실에서 정리한 내용에서, 실수가 있었던 부분을 내가 붉은색으로 바꿔본 것이다. 해당하는 부분은 耳目手足, 그리고 이다. 이목과 수족은 원래의 필사본에는 없었다. 즉 글의 진행은 太少陰人之耳目 不如太少陽人之耳目 視聽之力不及也20)太少陽人之手足 不如太少陰人之手足 行去之力不及也’ 21)로 되는 것이 맞다.22) 물론 정리한 내용처럼 이목과 수족이 반복해서 들어간 것에 큰 문제는 없다. 박윤희 원장인지, 경희대 사상의학교실인지 누가 그런 것인지 잘 알지는 못하겠다.

 

 

그럼 왜 그랬는지를 짐작해 보아야 한다. 아마도 장서각본의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가 이목과 수족을 漏落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런 판단이 아니었다면 내용의 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동무 공의 저작을 다루는 중대한 작업에서 없던 것을 새로 끼워 넣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좀 더 깊게 궁리해보자. 필사를 했던 사람이 같은 글자도 아닌 이목과 수족을 동시에 누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무 공은 글을 쓸 때 불필요한 단어를 重複해서 쓰지 않는, 簡潔하고 凝縮된 글쓰기를 한다는 사실을 想起했어야만 한다.23)

를 잘못 옮긴 것이다. 아마도 박윤희 원장의 실수 같다. 이 문장은 然則左手足不如右手足 左手足太少陽人之手足 不如太少陰人之手足24)으로 되어야 한다.

장서각본譯註한 이창일은 위에서 지적한 부분을 교정하지 않고 그대로 작업을 했다. 필사된 원본과 텍스트 작업된 자료를 세밀하게 대조하지 않았던 것 같다.

 

(5) 東武藥性歌

두 자료에 함께 들어 있는 내용도 있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동무약성가, 四象人食物類, 四象人要藥 保健省本에만 있는 내용이다. 다음을 期約한다. 이능화는 保健省本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1) 韓東錫, 東醫壽世保元註釋誠理會出版社 1967.

2) 朴性植, 東武 李濟馬家系生涯硏究」 『사상의학회지1996.

3) 량병무.차광석, 東武遺稿국역 한의학대계 15권 해동의학사 1999. 3.

4) 이창일, 東武遺稿청계 1999. 11. 1.

5) 李璟城, [檢索本 東武李濟馬先生 全體 原文資料] 2000. 4. 24.

 
각주

1) 이능화(1869.1.9.~1943.4.12.) 
   역사학자·민속학자이다. 字는 子賢, 號는 侃亭·尙玄·無能居士이다. 충청북도 槐山 출신이다. 홍문관 교리와 이조참의, 군국기무처 회의원을 지낸 李源兢(1849~1919)의 아들이다. 21세 되던 고종 26년(1888년)에 상경하여, 서로 다른 외국어를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면서 외국어를 배워서 영어·불어·중국어·일어에 능통하였다.
   저서에 『조선불교통사』, 『조선무속고』, 『조선해어화사』, 『한국도교사』 등이 있다.

2)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下篇』 京城 新文館 大正七年(1918년)

3) 「四象學說人稟性情」 
   公於經術 宗韓雲翁先生 以其格物致知 窮理盡性 自出易學 
   著有 〈東武遺稿〉 〈格致考〉 〈東醫壽世保元〉 等書 
   創四象學說 蓋其學卽心理也 性理也 生理也 醫理也

4) 물론 1900년에 동무 공이 작고한 이후부터 1918년 사이에, 누군가가 동무 공의 남겨진 원고를 정리하여 〈동무유고〉라고 이름을 붙인 筆寫 자료를 이능화가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5)  文一平, 『朝鮮名人傳』 朝鮮日報社 1934. 

6)  六堂 崔南善은 1922년에 新文館에서 나온 『時文讀本』 卷4에서, 李東武를 “어디에도 師承을 댈 길이 없을 만큼 獨創的”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7)  이능화의 아버지 李源兢(1849~1919)의 집

8)  國譯 韓醫學大系 (全15卷) 海東醫學社 1999. 3. 30.

9)  2005년부터는 한국학중앙연구원

10)  하성문고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초대 원장이었던 霞城 李瑄根(1905~1983)이 퇴임할 무렵인 1978년에, 소장하고 있던 도서를 기증하여 설립된 것이다.

11)  이창일, 「東武 李濟馬 思想의 基本構造」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1996.

12)  이창일, 『東武遺稿』 청계 1999. 11. 1.

13)  이강재, 『8체질론으로 읽은 동의수세보원』 杏林書院 2020. 5. p.216~220

14)  『素問』 第5 「陰陽應象大論篇」 
   天不足西方 故西北方陰也 而人右耳目不如左明也
   地不滿東南 故東南方陽也 而人左手足不如右强也

15)  韓東錫, 『東醫壽世保元註釋』 誠理會出版社 1967. p.11~12

16) 한동석의 책에 「동무자주」가 실리게 된 과정에 대한 逸話가 傳한다. 宋一炳이 東洋醫大에 다니던 시절에 동무 공의 후손인 李鎭胤으로부터 받은 것을, 1965년 12월에 대한한의학회와 서울시한의사회가 공동 개최한 사상의학학술강좌에 참석하여, 강사로 나온 한동석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17)  飜譯整理 : 高炳熙․洪錫喆․李義柱, 慶熙大學校 韓醫科大學 四象醫學敎室
    發行日   : 1997年 2月

18) 金白熙는 박윤희 원장이 1995년에 〈장서각본〉을 발견하던 당시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藏書閣의 조교였고, 韓國學大學院의 철학박사 과정에 있었다. 

19)이창일, 『東武遺稿』 청계 1999. 11. p.20 각주 7)

20) 태음인과 소음인의 耳目은 태양인과 소양인의 이목과는 다르므로 보고 듣는 능력이 不及하다.

21)태양인과 소양인의 手足은 태음인과 소음인의 수족과는 다르므로 걷는 힘이 불급하다. 

22) 〈장서각본〉 筆寫 원본과 〈보건성본〉 번역본, 그리고 『동의수세보원주석』의 내용을 비교하였다.

23)  사상의학 연구자들은 종종 과거의 筆寫 자료를 향해서 ‘加筆’ 운운하곤 한다. 그런데 이것은 엄연한 ‘디지털 가필’이다.

24) 그런 즉 左手足은 右手足과 다르다. 左手足은 태양인과 소양인의 手足으로, 태음인과 소음인의 手足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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