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106) 비행(非幸)의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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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106) 비행(非幸)의 구간
  • 승인 2021.05.07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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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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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dis@hanmail.net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김영호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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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반팔 티셔츠를 사러 갔다. 늘 행사제품이나 2만원 내외의 티셔츠만 사다가 이날은 조금 비싼 티셔츠를 사게 됐다. 옷 가게 사장의 오늘 입고된 신상이라는 말에 아내가 카드를 넌지시 내밀어 39,900원짜리 고가(?)티셔츠를 2장이나 샀다. 다음날 출근하며 새 옷을 입었는데 기분이 좋았다. 평소보다 조금 비싸서 그런지 소재도 좋은 것 같았다. 은근히 행복감이 느껴졌다. 이번 글은 그 순간 스친 생각의 갈무리다.

남녀노소 모두가 갈망하는 행복(幸福)! 어느 순간 우리에게 행복은 꼭 이뤄야 하는 숙제가 되어버렸다.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 일상을 떠나거나 혹은 일상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요령 있게 재테크도 잘 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자신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미디어도 우리를 부추긴다. ‘당신은 행복해야 돼. 행복하지 않은 삶은 이상한거야. 봐, 다들 행복하잖아~’ 이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해준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일상은 비타민 광고처럼 상큼하지도 않고 공익광고처럼 따뜻하지도 않다. 그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반복된다. 이런 시기에 행복을 갈망하면 할수록 평범한 일상은 불만족스러워진다. 인생은 원래 평범한 것인데 특별한 행복이 일상적인 것 같은 환경에 둘러싸이다보니 평범한 일상이 초라해져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幸福)과 불행(不幸)만 생각하지만 나는 그 사이에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구간에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특별히 행복한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특별히 불행한 일이 짓누르는 시기도 아닌 비행(非幸)의 구간,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이 구간이 늘 공허하게 느껴지면 점점 불행한 기분상태로 치우치게 된다.

최근에 소소한 행복감을 느낀 순간을 생각해봤다. 온라인으로 매장보다 훨씬 저렴하게 세탁기를 구입해서 잘 설치된 순간, 아내가 당첨된 호텔 할인권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때, 아들 생일 선물로 사준 포켓몬 카드에서 슈퍼 레어 카드가 나와서 두 아들이 까무러치게 좋아할 때, 나는 행복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에서도 행복한 순간은 적지 않다. 인생의 어느 순간 무엇을 잃어보면 절망과 슬픔의 시간이 지난 후 놓치고 살았던 행복의 새싹이 보이기 시작한다. 앞만 보며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새싹들이, 달리던 말에서 내린 후 보이기 시작한다. 상실의 시기를 묵묵히 인내한 덕택이다. 그 전보다 세상의 속도는 느려지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 숲을 푸르게 채울 수 있었던 것은 큰 나무 때문이 아니라, 나무 사이의 수많은 이름 없는 풀들 덕분임을 알게 된다.

학교를 다닐 때는 같은 시간, 같은 길 위를 달린다. 하지만 졸업 후에는 각자의 계절이 인생의 무대 위에 펼쳐진다. 내가 겨울을 지나는 동안 친구는 따스한 봄 햇살을 만끽하기도 하고 내가 인생의 여름을 누리는 동안 누군가는 겨울을 견디고 있을 수 있다. 남의 계절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인생의 계절은 변한다는 점이고, 영원한 여름과 영원한 겨울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행복할 필요가 없다. 매일 행복을 좇는 것은 오히려 갈증과 허기를 불러일으킨다. 지금 특별히 불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인생이다. 이국종 교수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전장(戰場)을 누볐던 미국의 외과 의사이자 육군 군의관 올 굿 대령의 얘기를 접했다. 전쟁터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그에게는 스스로를 달래는 말이 있었다. ‘It is what it is (그렇고 그렇다. 어차피 일어난 일인데 훌훌 털고 넘어가자)‘ 라는 뜻이다.

이국종 교수 본인도 항상 우울하지만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으로 이 말을 꼽았다. 최근에 나도 카톡 프로필에 올 굿 대령의 It is what it is를 적어두고 있다. 원뜻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래, 그럴 수 있다.‘는 의미로 종종 스스로를 달랜다.

멀리 가려면 짐 가방이 가벼워야 한다. 매일 매일 ’왜 나는 행복하지 않지?‘라는 생각은 머리를 무겁고 복잡하게 하는 번뇌일 뿐이다. ’별 거 아니다, 그럴 수 있다, It is what it is, 항상 행복할 순 없다, 지금 정도면 다행스런 삶이다.‘ 이런 말들로 머릿속을 비워내고 또 비워낼수록 인생의 먼 여정을 가볍게 갈 수 있다.

39,900원의 새 티셔츠 한 장에 행복했던 어느 아침, 내 취향을 항상 기억해주는 카페 직원이 나를 반겨준다. ’아이스 라떼 얼음 적게, 시럽 한번 맞으시죠?‘ 새 옷 입고 마시는 아이스 라떼, 참 맛있다! 그거면 됐지. 큰 행복도 큰 불행도 아닌 비행(非幸)의 구간, 나는 지금 그 위를 지나고 있다. 감사하고 다행스런 마음으로.

김영호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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