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치매가 베어낸 빈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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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치매가 베어낸 빈 자리
  • 승인 2021.05.2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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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린애

김린애

mjmedi@mjmedi.com


도서비평┃낯선 이와 느린 춤을

최근에는 치매가 대중문화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작품 속의 치매 환자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웃음”을 보여주고 “잊혀 가는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남겨져 있는 시간 동안 주변을 정리하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또 주위 사람들은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어릴 때 받았던 사랑을 돌려주려” 노력하고 “이제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내가 기억하겠다”라며 끌어안고 사랑을 전한다. 이런 작품 중엔 매우 감동적이고 좋은 작품들도 많지만, 치매가 이런 병일까? 임상 사례나 전문 서적, 하다못해 뉴스에서 만나는 치매와 이런 작품들 속의 치매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메릴 코머 지음, 윤진 옮김, MID 출간
메릴 코머 지음, 윤진 옮김,
MID 출간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은 기자로 활동하던 저자 메릴 코머가 치매 환자인 남편과 살아온 20년을 그리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의 의사였고, 혈액암의 권위자이기도 했던 남편 하비 그랠닉 박사에게 50대에 조발성 치매가 발병한다. 그는 “머리 좋고 자기중심적이며 전형적인 과학자”였던 사람이기에 스스로 치매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수년간 기억이나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증상을 숨길 수 있었다. 자제력의 저하 증상은 숨길 수 없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원래 “다소 까탈스러운 성품”의 하비가 스트레스로 변덕스럽고 무모한 행동을 한다고 여겼다. 차츰 증상은 심해져 가족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고 운전은 무모해지고 주위 여성 동료들에게 성희롱으로 신고당한다. 심지어 직장에서 만난 이성과 불륜을 저지르다가 아내에게 발각되기도 한다.

이런 혼란 끝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되었지만, 그 후로는 증상이 급격히 진행된다. 아직 젊고 체력관리가 잘 된 188cm에 84kg의 환자가 불안감과 공포, 자제심 저하로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릴 때 평범한 요양 시설이나 간병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돌봄은 고스란히 아내의 책임이 됐다.

금전적인 고통도 심각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할 50대의 두 성인으로 구성된 가족이 모두 일자리를 잃고 개인 간병인까지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재산을 지키고 의료혜택을 받으려면 재산을 정리하거나 이혼을 하는 편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저자는 더 절박한 사람이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남편이 몇 년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으니까 버텨나간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 사이 메릴의 어머니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된다. 활동적인 방송기자였던 메릴은 검은 옷만 입고 거의 집에서만 생활한다. 알츠하이머병 재단의 대표가 되었음에도 대부분의 일을 전화로 처리하면서 간병을 계속한다. 정작 자신의 건강검진을 받은 지 10년이 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잠이 들어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자각한다. 기분 전환 삼아 어디론가 떠나는 로맨스 소설을 써도 소설 속에서조차 오래 떠나있지는 못한다.

메릴은 알츠하이머 연구에 참여하며 자신이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면 너무 오래 살지 않게 해달라는 서류를 작성했다. 아들은 자신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자신에게는 “부담을 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죽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과의 기억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기에 더더욱 외롭고, 남편과 사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편이 마지막으로 느끼는 촉감이 내 손길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읽으면서 지극한 모순을 느꼈다. 자신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러니 더 외롭다. 아들은 자신과 같은 부담을 받지 않기를 원하지만, 자신은 남편과 어머니가 더 좋은 도움을 받기를, 마지막까지 자신의 돌봄을 받기를 원한다. 마치 산불이 번져가지 못하게 불타는 곳 주위의 나무를 베어내는 모습이 연상된다. 메릴은 그 주위 가족들에게 불이 옮겨가지 않도록 자신을 베어내 빈자리를 만들고 있다. 읽는 내가 느끼는 모순이 자신과 그 자녀에게는 얼마나 더 큰 것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이 모순을 해소할 답은 아무도 이런 상황에 부닥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어느 누구도 저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메릴의 말이 답이다. 개개인이 준비되지 않은 채로 치매에 외로이 부딪히면 안 된다. 그래서 메릴은 책을 쓰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재단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 치매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당장 존재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의 노력과는 별개로 치매가 어떤 병인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한 사회전반의 이해와 기반이 필요하다.

 

김린애 / 상쾌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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