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30] 박희수(상지대 부속 한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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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30] 박희수(상지대 부속 한방병원장)
  • 승인 2004.10.2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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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경험방 찾아 방방곡곡 헤매
“정통성 잃지 말고 본연의 학문 연구해야”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요즘 벌써부터 겨울을 재촉하는 듯 하다. 주중엔 진료와 강의를 위해 강원도 원주에 머물고, 금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자택이 있는 서울로 올라온다는 박희수(63) 상지대학교 부속 한방병원장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근의 한 음식점에서 만날 수 있었다.

■ 한의계와의 인연

부산 영도가 고향인 그는 어린시절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의생(옛날 한약업사)이었던 조부에 관한 얘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평소 희생정신과 봉사정신이 강했던 그의 조부는 특히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무료진료도 펼치는 등 댓가없는 인술에 인색하지 않았다 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어린 그의 마음에도 막연한 동경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소 어려운 가정형편속에서 자란 그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하고 숙부가 운영하던 가내공장에서 1년 간 일을 돕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놀러온 친구들의 대학생활 얘기에 마음이 흔들린 그는 다시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는다.

이듬해인 1962년 동양의약대 한의과(경희대의 전신)에 입학하게 되면서 어린시절 가졌던 조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현실화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 재단이 부실해져 폐교될 위기에 처하는 등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과대표를 맡았던 그로선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재단 구성의 방법을 찾으려고 학장과 교수들을 찾아다니면서 동분서주 뛰어다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등록 기한을 놓치는 등 이래저래 2학기 등록이 어려워진 그는 고민끝에 등록을 포기하고 공군에 입대한다. 3년 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동안 학교는 경희대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복학하게 된 그는 이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6년동안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해야만 했다.

졸업후 1년 간의 부원장 생활을 거쳐 73년 서울 남대문에서 ‘대동한의원’을 개원한 그는 침치료로 점차 명성을 얻어갔다. 그가 침치료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대학시절 이수호·최용태 선생 등으로부터 침구학을 배우게 되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느덧 그의 침치료는 멀리 지방에까지 입소문이 퍼져 환자들로 붐빌 정도가 됐다. 또 80년대 중반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한의대생들의 요청으로 방학때만 되면 한의원에서 침구학 강의도 여러차례 했다.

이렇게 한 곳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며 25년 간 개원의 생활을 해오던 박원장은 91년 전주우석대 한방병원을 거쳐 92년 대학동기들의 요청으로 상지대한방병원 개원멤버가 되었다. 이때의 인연이 한방병원장으로 취임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 침구학의 대가로

올해로 한의계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43년째라는 그는 뒤돌아보면 덧없이 보낸 시간들이 많았던 것 같아 후회스럽다고 했다. 물론 개원의 생활을 하는 동안 침치료에 관한 임상경험들은 많이 터득했지만 연구생활을 좀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박원장은 그 자리에서 치료해서 달라지지 않으면 그것은 침치료가 아니라고 말했다. ‘일침, 이구, 삼약’이라 해서 첫째가 침이요, 둘째가 뜸, 셋째가 약으로 즉 세가지 중 휴대가 가장 간편하면서도 환자들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침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침은 제1치료법이며 무엇보다 환자의 증상이 가장 쉽고 빠르게 효과 볼 수 있는 치료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의 호도 혈자리의 하나인 ‘隱白’이다. 박원장은 “隱白은 엄지발가락에 있는 혈자리로 침치료 혈중에서 가장 임상에 필요한 혈이고, 또 가장 땅바닥과 가깝고, 낮은 자세로 있으면서 큰 치료효과를 내는 혈자리”라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혈자리라고 했다.

그는 요즘 후학들을 보면 너무 얕은 생각으로 쉽게 공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다닐 당시만 해도 우직할 정도로 학문을 파고드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요즘의 흐름을 보면 정통성을 잊고 너무 겉모습에만 치중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늘 학생들에게 한의사인지, 양의사인지, 물리치료사인지 모를 정도의 애매한 임상은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한의학은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정통성을 가진 우리의 학문이므로 그 정통성을 잃지 말고 본연의 학문을 연구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또 “의사가 의관(醫觀)이 없으면 의사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어떤 질환에 대해 오늘과 내일과 모레가 달라지는 것은 자기의관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의 좌우명은 ‘환자는 의사를 잘 만나야 되는 것’이란다. 환자는 의사를 잘 만나야 고생을 덜 할 수 있고, 빠른 쾌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대로 된 공예품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요한다”고 말했다. 하물며 인체를 다루는 의사라면 10년 이상의 각고를 겪지 않고서는 의사라고 칭하지 말아야한다면서 그만큼 의사로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 30년만에 지킨 약속

30년 전 자신과의 약속을 耳順에서야 지킬 수 있었던 박희수(63) 병원장은 굳은 의지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우수경험방 수집에 나섰지만 때론 심한 문전박대에 포기하고 싶어지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한의학계와 후학들을 위한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서울 남대문에서 개원의로 활동하던 시절 가까운 곳에 한약방을 하던 70대의 원로가 있었다. 그에게서 오랜 임상경험을 배우고 싶어 하루가 멀다하고 무조건 찾아가 말동무도 해드리고, 심부름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사정이 생겨서 얼마간을 찾아가지 못했는데 그 사이에 70대 원로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박원장은 “그 분이 알고 계신 건 많은데 그렇게 그냥 돌아가신 것이 너무도 한스러웠다”고 말하면서 “언젠가 경험방들을 모아서 후학들에게 남겨주고, 그런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좀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30년전의 일. 그 당시만 해도 55세 전후로 시작할 생각이었으나 그동안 이런저런 상황들 때문에 환갑나이가 되어서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지난 2002년 9월 대학에서 1년간의 휴식년이 주어져 강원도를 시작으로 충북, 충남, 대전, 대구, 경북, 전남, 인천, 서울 등 제주도를 제외한 전역을 돌아다니며 우수경험방을 수집했다. 임상경력 30년 이상이면서 70대 이상의 원로들이 우선방문 목표였다. 이렇게 혼자서 카메라, 비디오, 녹취기 등을 가지고 1년간 돌아다니며 만난 한의약계 원로는 500여명에 이른다고.

대부분 한결같이 열심히 연구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볼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속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이 가장 큰 설움이자 의욕을 꺾는 일이었다”면서 “육체적이나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정신적 어려움이 가장 힘든 점이었다”고 했다. 또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역마다 다른 물을 마셔 배탈이 잦았던 것도 어려움중 하나였다고 했다. 이런 그에게 왜 어려움을 사서하냐며 그만두고 학교로 복귀하는 게 어떻겠냐는 친구, 선후배, 제자들의 애정어린 충고들도 많았다고 한다.

■ 제1회 류의태·허준상 수상

박교수는 “어제오늘 짧은 시간에 이 사업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고, 수십년동안 마음속에 간직해왔던 나와의 약속이었다”면서 “이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는 일이었기에 끝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만약에 한번 더 기간을 줄 테니 하겠느냐고 한다면 다시 또 할 의향이 있다”면서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음을 강조했다.
우수경험방 순회기간중인 지난 2002년 10월에는 그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회갑기념 논문집을 봉정했다. 그는 “준 것보다 더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편 그동안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강원도 횡성군에서 7년간 실시했던 주말 의료봉사와 전국우수경험방 수집을 위한 탐방, 각종 저서편찬 및 연구논문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아 올 봄에는 경남 산청군이 제정한 ‘류의태·허준賞’ 첫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쓰고 있는 전국우수경험방 수집자료를 알차게 정리해서 3년 이내에 햇볕을 보게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란다. 더불어 정년까지 얼마남지 않은 기간에도 환자와 학생들의 교육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다짐도 보였다.

아울러 그는 늘 학생들에게 졸업해서 한의사면허를 받게 되면 하나의 업이 아닌 ‘천직’이라 생각하라고 당부한다면서 그 역시 의료인으로서 이 길을 ‘천직’이라 생각하고 정년이후에도 어떤 방향으로든 계속 활발히 활동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백 박희수원장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수혈연구 침구학’(의성당 刊, 1996), ‘두침학’(의성당 刊, 1998), ‘M.P.S와 침구경혈학’(일중사 刊, 1999) 外 다수가 있으며, 그의 가족으로는 부인 이추자(62)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가 있다.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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