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서주희의 도서비평] 울분이 만드는 조각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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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서주희의 도서비평] 울분이 만드는 조각난 사회
  • 승인 2021.09.17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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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희

서주희

mjmedi@mjmedi.com


도서비평┃울분

한의사라면 누구나 화병 환자에 대한 진료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독특한 문화증후군으로써 우리나라 정서에서 뗄 수 없는 한(恨)의 정서를 품으며 여러 가지 신체적 심리적 증상을 동반하는 그것이죠. 환자분들도, 또한 임상의들도 쉽게 화병이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본인이 먼저 화병인 거 같아요 라고 오시는 분도 있고, 화병이라고 진단을 내리면 격하게 공감하며 그간의 고통을 인정받은 듯 그래 맞아요. 내가 화병이지 하며 수용하여 치료를 시작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화라는 감정이 해결되지 못한 채 쌓여 응축되면 좀 더 강조하고 싶은 의미로 울화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Michael Linden, Andreas Maercker 지음, 강형원 외 옮김, 군자출판사 출간
Michael Linden, Andreas Maercker 지음, 강형원 외 옮김, 군자출판사 출간

그런데 최근 들어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 보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그리고 환자분들에서도 분노라는 정서가 상당히 많이 느껴져 앞으로의 사회가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생각할 때마다 화나는 일이 있고, 복수하고 싶고, 바뀌지 않는 상황으로 무력감을 같이 느끼고,,,

같은 색깔이어도 스펙트럼에 따라 그 질감과 명도가 다르듯 화병이라고 하기엔 뭔가 다른 분노의 패턴양식을 보여주는 환자들을 꽤 만나볼 수 있습니다.

울분장애, 외상후 울분장애라는 진단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외상후 울분장애(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 이하 PTED)는 임상에서 기존의 적응장애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화병 진단으로 분류할 수 없는 특정한 증후군의 개념으로 일상생활에서의 부정적 사건에 의해서 유발되며 이후 사회에 대한 불공정함, 울분, 분노, 무기력감을 나타내며 기본적 가치관의 손상을 느끼는 상태를 일컫는데, 독일의 정신의학자 Michael Linden에 의해 소개되었습니다.

“embitterment”가 한국어로는 울분으로 번역되었는데, embitter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니 “very angry about unfair things that have happened to you (Cambridge Dic)” 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개념이 독일의 정신의학자에서 나온 이유는 90년 통일 이후 너무나 다른 환경의 변화로 인해 혼란을 겪은 동독인들의 정신적인 고통과 호소하는 문제들이 기존의 DSM-IV의 진단적 범주로는 잘 설명되지 않아, 기존의 진단과 다른 PTED를 제안한 것입니다. PTSD의 주된 정서가 공포, 불안이라면 PTED는 핵심감정이 울분, 복수심으로 표현되며, PTED는 부정적 사건 이후 자발적 관해가 잘 되지 않으며 만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했습니다. 화병은 참고 견딤을 미덕으로 보았던 한국의 문화적 배경으로 개인의 희생을 피할 수 없는 삶의 결과로 보아 발생하며 자발적으로 치료를 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지만 PTED는 적극적 복수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Linden은 독일의 통일과 같은 사회적 특수한 환경뿐 아니라 직장에서의 갈등, 해직, 이혼, 상실 등 일상생활의 부정적 경험에 의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자 했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는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진다 하였습니다. 불공정한 사회가 인간의 몸에 새겨진 증상이 울분장애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울분은 개인적 측면 외에 사회적 측면을 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 집단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의 울분은 어떨까요?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유명순 교수팀의 울분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에서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독일보다 약 6배 높고, 국민의 절반이상이 만성적 울분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특히 개인∙기업의 갑질, 직장∙학교 내 괴롭힘∙차별, 정부의 비리나 은폐, 언론의 왜곡 등이 울분을 일으킨 사안이라 하였고, 젊은 층일수록 울분을 많이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국내 정신의학계도 울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울분장애를 방치하거나 극심해지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거나 공격적 반항, 과민함, 분노폭발, 폭력, 자해 혹은 살인환상 등 극단적 행위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입 및 사회적 관심이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울분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개인적 건강 뿐 아니라 사회의 건강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공정하지 못함으로 인해 울분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는 결국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조각난 사회가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책은 울분에 관한 최신의 연구 결과들을 모아놓은 책으로써 울분의 특성, 개인적∙사회적∙ 문화적 배경으로써의 울분의 질병상태, 울분의 치료적 관점, 울분의 진단체계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어 임상적으로 울분장애 환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틀을 제공해줍니다. 개인적으로는 화병이나 PTSD로 설명되지 않는 강한 억울감을 주된 정서로 어려움을 호소하던 환자들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이 책을 만나 뭔가 지도를 얻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책이 나올 수 있던 근간이 독일연금보험의 지원으로 울분에 대한 연구가 가능했다는 것인데, 장기적인 울분이 잦은 병가와 조기은퇴, 조기연금의 신청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인식하며 이것이 사회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제안하는 울분장애의 치료법으로는 용서치료와 지혜 심리치료입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고통을 인정해주고, 더 이상 이러한 고통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노력하는 지혜롭고 정의로운 사회가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까요?

 

서주희 / 국립중앙의료원 한방신경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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