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111) 쉬었다 갈까? 어른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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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111) 쉬었다 갈까? 어른의 시간
  • 승인 2021.10.29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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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김영호

doodis@hanmail.net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김영호
한의사

어릴 때는 총에 맞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어린이의 전능감(全能感)이라고 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이젠 주변에 우주에 가고 싶다거나, 새처럼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우리는 이미 어른의 시간에 진입한지 오래다. 의심이 많아지고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합리적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 느끼는 전능감의 바탕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깔려있다. 그곳엔 꿈과 희망이 야생화처럼 피어있다. 그런데 어른은 그렇지 않다. ‘진짜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반복되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데 익숙하다. 긍정적인 가능성은 최소화하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온힘을 쥐어짠다. 모든 순간에는 ‘이성과 합리’가 최우선이다. 최근에 이렇게 합리적인 생각만 하며 살고 있다면 당신은 어른이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노화(老化)되고 있는 진짜 어른.

어른의 시간과 달리 어린이의 시간은 비효율적이고 느리게 흘러간다. 어린이에게 세상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로 가득하다. 합리적인 선택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늘 재미있는 선택을 한다. 재미있는 선택은 어른의 관점에서 대부분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그 선택들은 재미와 추억을 가슴 깊이 남긴다.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는 아주 작은 시간의 단위로 저장된다. 어릴 적,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 것 같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 공간을 채울만한 새로운 재료들이 줄어든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구분 짓는 신선한 경험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만약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어른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 많다면 원치 않는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났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계획적인 어른의 시간은 같은 모습으로 매일 매일 복제된다. 다채로운 추억이 줄어드는 대신 시간과 시간 사이의 공간은 효율적으로 채워진다.

나는 어른의 시간을 가능한 천천히 살고 싶다. 그래서 <합리:合理>라는 걸 좀 내려놓으려고 한다. 노련한 어른들의 <합리적인 선택> 대신에 조금은 비합리적이지만 재미난 선택들로 삶을 채워가려 한다. 미래를 걱정하고 현재를 효율화하는 대신, 오늘 하루를 최대한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혹여 미래에 대한 걱정이 먹구름처럼 밀려올 때면 ‘오늘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해야 기분이 좋을지에 대해 집중한다.

걱정스런 작은 이벤트만 생겨도 우리의 뇌는 부정적 가능성을 대비한다. 어른의 시간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 나는 보이지 않는 앞 대신 옆을 보려한다. 앞을 보면 걱정이고 뒤를 보며 후회일 테니 차라리 옆을 보며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느껴본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면 일어날 것이고, 걱정을 한다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기에 내 옆을 지나는 풍경을 더 담고 음미하는 것이 남는 장사다.

어느 날, 우리의 인생도 출발과 도착 시각이 정해진 열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열심히 앞을 향해 간다고 갔지만 기껏 10호 칸에서 1호 칸으로 이동한건 아닐까? 앞으로 갔다고 생각하지만 도착시간은 같은 것 아닐까? 심지어 도착역에서 기차 역 밖으로 빠져나가는 출입구는 10호차가 더 가까운 건 아닐까? ‘열심과 최선’에 중독된 사람들을 보며 해봤던 상상이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선택을 하는 게 어른다운 모습 같지만 나의 삶을 Level-up 시켜줄 수 있는 엄청난 기회는 가장 ‘나다운 곳’에서 만나기 마련이다. 평범한 ‘누구나’가 되기 위해 변하지 말고,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묵묵히 자기자리를 지키다보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그 기회를 만날 때까지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훨씬 빛나게 만들어 줄 거라 믿는다.

지금 일상이 힘들기만 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잠시 어른의 시간을 쉬어보자. 그리고 어릴 적 나라면 했을 것 같은 엉뚱한 선택을 해보자. 그런 엉뚱한 선택들로 어른의 옷을 하나씩 벗다보면 ‘진짜 내가 갈 길’을 만날지도 모른다. 혹, 나를 그 길로 데려다 줄 기회나 귀인(貴人)을 만날지도 모르고. 이 모든 놀라운 변화는 어른의 길 밖에 있다.

누리호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오늘, 저 먼 우주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상상을 해본다. 먼지보다 작은 것이 나와 여러분이다. 이 작은 존재가 쥐어짜낸 합리(合理)라는 건 사실 별 거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인생의 걸림돌이 기회의 문(門)일수 있고, 비단 같은 레드카펫이 절벽 끝으로 가는 길 일수도 있다. 잠시 어른의 시간을 쉬면서 유치하고 어린 나를 만나러 가보자. 어른이 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김영호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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