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1012> - 『治疹指南』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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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1012> - 『治疹指南』①      
  • 승인 2022.05.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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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answer@kiom.re.kr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동의보감사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의보감사업단에서는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왔다. 최근기고: 고의서산책


先天稟賦說 주장한 최후의 麻疹家

  일제강점기 서양의학을 앞세워 제국통치의 기반으로 경찰위생제도를 설치하고 조선인을 비위생적이고 미개한 식민지백성으로 취급했던 시기, 치명률이 높은 역병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여전하였다. 법정전염병을 고시하여 격리수용하고 예방접종제도를 시행하였지만 늘 그렇듯 약은 부족하고 이질적인 치료법에 대한 조선인들의 공포심은 경찰통치만큼 크게 증폭되었다.

 ◇ 『치진지남』

  1936년 간행된 이 책은 전통 홍역치료법에 관한 전문의서로서는 마지막 모습을 간직한 책일 듯하다. 연활자로 인쇄한 선장본으로 이제면에는 종서로 내려 쓴 편액이 사진으로 실려 있다. 중앙에는 서명인 ‘治疹指南’이라 적은 篆文이 자리 잡았고 왼편에는 ‘八十一翁 愚觀題籤’이라 적고 2과의 도서가 찍혀 있다. 백문으로 된 것은 劉漢春印, 주문에는 愚觀이란 작가 명호가 새겨져 있다.

  작가 劉漢春(1848~?)은 사자관 가문의 출신으로 본관이 한양, 자는 元擧, 호는 愚觀이다. 1876년(고종13) 식년시에 천문학을 전공하여 입격하였다. 형인 海觀 劉漢翼(1844~1923)은 해서에 능하였고 근대 5대가로 꼽힐 정도였다. 형제가 함께 사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두 사람 모두 전서와 전각에 뛰어난 기량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문이 여럿 붙어 있는데, 맨 먼저 등장하는 것은 甲戌년(1934)에 작성한 朴泳孝(1861~1939)가 지은 ‘치진지남서’이다. 그는 이 글에서 마진은 소아의 大關嶺이니 소홀히 여기다가 한탄하게 된다고 말한다. 또 저자인 韓敬澤을 벗(友)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대개 관직에 있을 때, 비슷한 연배로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된다.

  두 번째 서문은 東園 李載崐(1859~1943)이 쓴 것으로 어려서 사람들이 혼처를 택할 경우, 반드시 배필이 될 남녀가 두창과 홍역을 이미 거쳤는지를 물었다고 하면서 홍역과 마진이 수명이 길고 짧은 지를 결정하는 커다란 관문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일찍이 홍문관 교리를 시작으로 고관직을 두루 거쳐 1907년 종1품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지만 일본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인사로 알려져 있다.

  3번째 서문은 鄭萬朝(1858~1936)가 쓴 것으로 자신이 어려서부터 잦은 병으로 인해 良醫를 찾아다니고 뛰어난 의술을 경험한 적이 많았다고 술회하면서 申舟村, 丁俟菴, 尹止軒 등과 같은 유의들이 남긴 저술과 의서가 신명을 통하고 조화를 궁구했다고 칭탄하였다. 나아가 문장과 理學에 믿음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의학을 말할 수 있다고 적어 유학적 소양에 중점을 두어 이 책의 특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인물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식민통치에 협력한 친일인사이다.

  4번째로 실린 것이 바로 저자의 자서인데, 내용은 시종일관 한의학의 병인병리설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두역과 마진에 대해서 외감과 내상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 병인설에서 벗어난 선천적인 질환으로 규정하고 음분열이 발출하여 콩 같은 과립이 생기면 痘라 부르고 양분열이 발생하여 삼씨 같은 과립이 생긴 것을 麻라 한다고 규정했다.

  그는 특히 이 병이 상한이나 전염병이라 말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즉, 풍한사기에 감촉되어 발생하는 것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감촉될 수 있고 여러 차례 거듭 발생할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한번만 거치면 다시 재발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또 만일 전염이라면 아무도 없는 데서 저절로 갑자기 발병하며, 걸리지 않았던 사람만 전염되고 이미 걸렸던 사람에겐 어째서 전염되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자문하며 자신이 선천품부설을 주장하는 근거이자 반증으로 삼고 있다. 이런 주장은 곧이어 밀어닥친 서구의학의 파도에 파묻히고 말았지만, 소아두진에 독자적인 병인설을 주창한 마진의가였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동의보감사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의보감사업단에서는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왔다. 최근기고: 고의서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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