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중택태 – 진실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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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중택태 – 진실한 기쁨
  • 승인 2022.06.17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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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장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힘들고 짜증나는 것도 견뎌야 하는 것이 인생이고, 그런 가운데 기쁘고 즐거울 거리를 찾아 마음을 다독이며 사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그러나 그 어느 쪽에만 치우쳐도 몸과 마음이 상한다. 이제마 선생께서 양인은 애노지심(哀怒之心)을, 음인은 희락지심(喜樂之心)을 주의하라고 한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주역에도 기쁜 상황을 나타내는 괘가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태괘이다.

태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兌 亨 利貞

彖曰 兌說也 剛中而柔外 說以利貞 是以 順乎天而應乎人 說以先民 民忘其勞 說以犯難 民忘其死 說之大民勸矣哉

 

기쁨은 감정이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합격 취소 위기에 놓인 학생 앞에서 그 다음 예비 순번의 학생이 뛸 듯이 기뻐한다면 인성을 의심받게 된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겠고 기뻐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시간이나 장소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기쁨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내가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이 몰락해야 나의 성공이 완성된다’ 는 말을 하는 사람은 기쁨을 얻는 방식이 매우 비뚤어진 것이다. 태괘의 기쁨은 군자의 기쁨이다. 자기보다 백성을 우선 생각함으로써 기쁨을 얻고, 기꺼이 어려운 일을 떠맡아 억울한 백성을 위로함으로써 기쁨을 삼는다.

 

初九 和兌 吉

 

상전에는 行未疑也라고 했다. 서로 응하여 화합하는 것에 의심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하다고 했다. 그러나 태괘는 제 짝끼리 서로 음양응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초구와 구사도, 구이와 구오도, 육삼과 상육도 서로 같은 성질의 것이라 서로 밀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구는 의심없이 제 짝인 구사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정도를 걷는 것이고, 그러니 길하다.

 

九二 孚兌 吉 悔亡

 

구이 역시 구오와 서로 같은 양효라 음양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이는 구오를 믿고 눈을 돌리지 않는다. 사실 바로 옆에 자리한 육삼과 함께하는 것이 기쁨을 쉽게 얻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이는 육삼에게 눈돌리지 않고 구오를 굳게 믿으니 또한 길하다.

 

六三 來兌 凶

 

육삼은 상육과 서로 음양응이 되지 않으며, 위아래로 양효와 마주하고 있다. 그러니 구이에게 붙든, 구사에게 붙든 양효에게 붙으려고 애를 쓴다. 육삼의 위치가 양효의 자리인 것도 육삼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옮겨다니는데 한 몫 한다. 자기 스스로 기쁨을 찾아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바라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기뻐하거나, 원래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빼앗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흉할 수밖에 없다.

 

九四 商兌未寧 介疾有喜

 

구사는 기쁨을 헤아려서 편안하지 않으니, 멀리하여 미워하면 기쁨이 있다.

구사는 바로 옆에 있는 육삼의 유혹을 받는 처지다. 만약 구사가 육삼을 이끌어 응한다면 아부나 재물에 넘어가 소인배를 권력의 중심에 참여시키는 것과 같다. 듣기 좋은 말이나 뇌물은 잠깐 달콤하겠지만 결국 나중에 화를 부른다. 그 잠깐의 기쁨을 멀리하면 나중에 화를 피하고 더 큰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되니, 자기 짝인 초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

 

九五 孚于剝 有厲

 

구오의 아래는 구사이고 위로는 상육이 있다. 자기 짝인 구이와는 멀고 음양응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육은 게다가 구오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러려니 원래 짝인 구이를 깎아내려 자기를 돋보이게 한다. 구오가 만약 그 꾐에 빠져 상육을 선택한다면 구사 역시 육삼을 내칠 이유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의리와 믿음을 지켰던 초구와 구이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올바름을 지키고 배신을 당한 상처는 두고 두고 오래 간다. 단전에서 말하듯 수고로움을 잊게 해주고 어려움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도 치유해줘야 하는 것이 구오가 있는 왕의 자리에서 할 일이다. 그 역할을 저버린다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上六 引兌

 

상전에는 이끌어서 기뻐한다는 것은 未光也, 빛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상육의 입장에서는 자기와 음양응도 되지 않는 육삼을 건사하느니, 바로 옆에 있는 구오를 노리는 편이 낫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육의 입장이다. 상육만 기뻐할 수 있고, 그 외의 다른 효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며, 제 짝을 잃게 되는 구이의 믿음은 배신당한다. 상육의 상황은 마치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 자기 눈에 드는 사람에게 이미 배우자가 있는데도 강제로 빼앗아 결혼하는 것과 같다. 자기와 동급으로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그 사람뿐이라고 해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드러내 자랑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기쁨을 얻는 방법은 사람마다 전부 다르다. 맛있는 것을 먹으며 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좋은 풍경을 보거나 운동을 하는 것으로 기쁨을 얻는 사람도 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활동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 사람도 있고, 그저 편안하게 조용한 장소에서 심신을 이완하는 것으로 기쁨을 얻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나에 대해 알아내야 하는 것들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으로 기뻐하는지, 나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인생에서 꽤 중요하다. 그래야 누구나 힘든 인생,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쉬운 기쁨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상처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다른 이를 깎아내림으로써 나의 우월함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며 나의 행복을 절감하고, 다른 사람이 가져서 기뻐하는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행복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한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런 행위가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이름 아래 당연시될수록, 사회에는 점점 더 기쁨이 사라지고 내 것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감만이 만연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발 아래 두는 것으로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언제나 그 머리 위의 누군가가 또 그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 마음만 내려놓으면 기쁨이 가까이 있을 텐데,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하고 제 자리도 아닌 다른 자리를 돌아다니며 기쁨을 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안쓰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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