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 8체질]체질의학과 동호 권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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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 8체질]체질의학과 동호 권도원
  • 승인 2022.07.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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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55

8체질의학을 창시한 동호 권도원 선생께서, 2022630일 오후 530분경에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이로써 창시자의 시대가 저물었다. 권도원 선생과 같은 시대를 호흡할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드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체질의학

체질의학은 한반도의 의학이다. 반도는 대륙과 해양, 해양과 대륙을 이어주는 통로이다. 나는 한반도가 키1)라고 생각한다. 해양에서 대륙을 향한 키(key)이면서 대륙에서 해양으로 뻗는 키()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중국의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허준의 동의보감2)이 탄생했다. 이것은 한반도의 자랑이요 동양의학 전체의 보람이 되었다. 그리고 사암도인은 오행의 원리를 바탕으로 장부허실보사법을 창안했다. 이른바 사암침법3)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외세에 의한 수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핍박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한민족은 그 정체성을 단 한 번도 잃지 않았다. 결핍 속에서 선각자의 예지는 오히려 빛난다.

동무 이제마(1837~1900) 공의 사상인론은 근대에, 주변 열강의 압력에 한민족이 초라한 처지에 빠지던 때에 세상에 나왔다. 동의수세보원4)이 알려지던 시기는 일제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시대였다. 권도원 선생의 8체질론은 한국전쟁으로 사회의 모든 기반이 무너져 내렸던 시절에 잉태되었다. 치욕과 혼란과 고통과 절망의 바닥에서 체질론과 체질의학이 싹을 틔웠던 것이다.

동무 공과 권도원 선생은 사람의 몸을 바라보는 의학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 두 분에 의해서 한반도에서 인류 역사 최초로 본격적인 체질의학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체질의학이 인류 최종의 의학(New Medicine)’이라고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이 세계가 아직 체질의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체질의학은 의학의 새로운 세계를 밝힐 자격과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체질의학의 원전은 동무 공의 동의수세보원이다. 동무 공은 자신이 만든 의학체계를 어떤 의학이라고 특정하여 명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면, 세상 사람이 장수하고 근원을 보존할 수 있을 것5)이라고 했다. 사상의학을 체질의학이라고 처음 지칭한 사람이 권도원 선생이다. 권도원 선생이 1958년에 고안한 체질침은, 사상인의 폐비간신 길항원리와 체질론적 병리론과 사암도인의 장부허실보사원리를 결합한 것이다. 체질침으로 인해서 비로소 체질의학은 실전의학, 실용의학의 태세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8체질론

8체질론의 뿌리는 사상인론이다. 권도원 선생은, 한증과 열증으로 나뉜 사상인의 병증론으로부터 8병근을 도출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8체질이 성립했다. 8체질의학은 선생의 체질침 논문을 통해서 8체질의 생리와 병리, 체질침법, 체질맥진법, 체질영양법이 차례로 발표되면서 의학적인 체계를 완성했다. 또한 8체질론을 떠받치고 있는 생명론과 우주론인 논문 화리6), 기독교에 기반을 둔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집약한 것이다.

 

한의사의 길

선생은 19211023일에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서천에서 활동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를 따라서 소년기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청년기에, 간도로 떠나는 아동개척단의 인솔자가 되어 백두산 아래에 가서 머물렀다. 해방 후에 귀국하여 서울에 있다가, 일본인들이 군산에 건설한 불이농촌을 불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족을 이끌고 옥구로 내려간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시기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옥구군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이요한이 제헌국회의원이 되도록 돕는다. 한국전쟁 중인 19529월에 전라북도 도지사에 임명된 이요한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된다.

1954년에 돌연 상경하여 서울 거리를 걷다가, 이현재 선생이 1945년에 창설한 사상의약보급회의 간판이 걸린 사상회관으로 들어간다. 이현재 선생에게서 사상의약을 지도 받으면서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보급회는 1957430일에 사상의학회로 출범하는데 역시 부회장을 맡는다. 이 해에 덕성여고 가정과 교사이던 곽현자와 결혼한다. 주례는 배은희 목사였다.

당초에 선생의 꿈은 목회자였다. 19583월에 한국신학대학 대학원 신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카운슬링을 배우러 떠나기 위해 서울대 문리대에 개설된 E.L.I.에 다니던 중에 눈병이 난다. 눈병은 선생을 실명의 위기로 내몰았다. 일본에서 발행된 책에서, 여구혈이 포함된 간허증을 목표로 한 침처방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시술하여 스스로 눈병을 고친다.

사상의학을 공부하면서 습득한 사상인 장부론의 길항원리와 침술의 장부허실보사 원리가 결합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고, 침술 연구에 매진하여 체질침을 고안한다. 1958년말쯤이다. 사상회관에서, 고질적인 항문 출혈로 고통을 받던 이현재 선생의 비서를 처음 치료한다. 근방에 소문이 퍼졌다. 명동에 국제빌딩을 소유한 사람의 오래된 불면증을 고쳐준 보답으로 그가 4층에 있던 자신의 사무실을 내어준다. 용한 침술가를 찾아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친다. 그러다가 사상의약보급회 시절부터 동갑내기 친구였던 배은성이, 19602월에 동양의대를 졸업하고 을지로2가에 개설한 은성한의원으로 옮겨가서 치료활동을 지속한다.

배은성의 소개로 알게 된 동양의대 노정우 교수의 권고로, 10회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에 응시해서 제1부 시험을 통과한다. 11회 검정시험에서는 제2부와 실지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962321일에 있었던 제13회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해서 한의사면허를 취득한다. 면허번호는 1295호이다. 서울시 중구 신당동 256-8, 첫 진료소인 대원한의원을 열었다. 목회자의 삶이 아니라 한의 임상가의 삶이 권도원 선생의 앞에 펼쳐진다. 선생의 나이 42세 때부터이다.

 

저작

권도원 선생은 위대한 임상가이다. 필생의 목표는 체질침을 통한 암치료법의 완성이었다. 선생은 1987년에 동틴암연구소를 설립하여, 제선한의원의 좁은 진료실 안에 은둔한 듯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암치료법 연구에만 몰두하였고, 20191월까지 진료실 현장을 지켰다. 비록 거창하지는 않지만 암 연구의 작은 결실이 20087월에 Amino Acids에 발표된 논문7)이다. 이 논문은 암 환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9개의 마크를 추적한 결과로, 체질침을 맞은 환자의 경우 이 마크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암이 치료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체질침 논문은 네 편8)이 있고, 기독교사상19807월호에 실은 하나님, 과학사상1999년 가을호에 실린 화리가 있다. Pyrologos(2002. 6.)8체질의학론 개요(2003)는 연세대학교 출판국에서, 화리는 동틴암연구소에서 2003년에 발간했다.

잡지와 진행한 인터뷰로는 미래한국357(2009. 11. 18.)모든 사람은 8가지 체질을 타고 난다, 363(2010. 2. 17.)에는 지구가 태양에 가까워지고 있다가 있고, 월간조선20115월호에 체질을 알면 천명을 안다가 실렸다.

 

강연

인천 상공회의소, 고려대(1986), 기독한의사회(1992. 5.), 경희대 UBF센터(1993), 경희대 한의대(1994), 도올서원(1995. 2. 19.), South Baylo 한의대(1995/1997. 8. 9.), 사상체질의학회(1995. 7. 29.), 자연의학회(1995. 11. 3.), 대구한의대, 상지대 한의대(1999. 6. 10.), 신기회 화리(1999. 10. 21.), 연세대 송암관(1999. 10. 28.), 한동대(1999. 11. 13.), 동의대 한의대(1999. 12. 16.), 일산 백병원(2000. 5. 25.), 신기회 처방(2001. 3.), 연세대 새천년관(2002. 5. 6.),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2005. 5. 26.), 수선재(2007. 10. 13.)에서 강연과 강의를 하였다. 강연에서는 체질의 존재에 대해서 실제사례를 근거로 제시하여 청중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체질은 반드시 여덟 가지라는 것을 강조한다. 선생과의 사전 교감이 없이 색채를 이용한 8체질 테이핑요법을 개발한 어강 선생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기고

19623월에 한의사가 된 후에, 19631023일에 [체질침 치험례]대한한의학회보기고하였. 이후에 의림45호에 [체질과 침](1964. 9. 30.), 대한한의학회보23호에 [묵살 당한 진리](1966. 2.), 1975 11월에 동양의학연구원에서 발간한 동양의학창간호에 [체질의학과 체질침]을 실었다.

빛과 소금9)은 두란노서원에서 펴내는 기독교 계통 월간 잡지인데, 사실은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온누리교회의 기관지이다. 권도원 선생은 이 교회의 장로로서 잡지 편집진의 요청을 받아, 19943월부터 199912월까지 총 27회에 걸쳐 8체질론과 관련한 글을 연재하였다. 독자층이 기독교인으로 한정되어 있는 셈이었지만 선생이 대중을 위해 직접 쓴 글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언론 매체에 남은 선생의 마지막 자취는 201337일자 민족의학신문892호에 긴급 투고한 [8체질 치료에 관하여]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H한의원 소속 모 한의사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 선생은 글을 통해서 나를 향한 비방과 우려를 전했지만, 나는 지금 같은 매체에서 선생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 삶의 아이러니다.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이때 키는 키(key)이기도 하고 키(舵)이기도 하다.
2) 1613년 간행.
3) 김달호의 논문에서, 1644년에서 1742년 사이에 성립하였다고 추정.
4) 1901년 栗洞契 간행.
5) 『東醫壽世保元』 「四象人辨證論」
   必廣明醫學 家家知醫 人人知病 然後可以壽世保元

6) 1983년 10월 24일 탈고. 『과학사상』 1999년 가을호에 발표.
7)  M.J.Paik · J.Cho · Dowon Kuon · K.-R.Kim, 「Altered urinary polyamine patterns of cancer patients under acupuncture therapy」 『Amino Acids』 2008. 7. 
8) Dowon Gwon, 「The Constitutional Acupuncture」 1962. 9. 7.
  Dowon Kuan, 「A Study of Constitution-Acupuncture」 『國際鍼灸學會誌』 1966. 6. 20.
  Dowon Kuan, 「Studies on Constitution-Acupuncture Therapy」 『中央醫學』 1973. 9.
  권도원, 「체질침 치료에 관한 연구」 『明大論文集』 1974. 1.
9)  1999년에는 잡지의 제호가 『소금과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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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 2022-07-09 12:29:51
안녕하세요 유익한 글 항상 감사히 보고있습니다.

질문이 있는데요

8체질에서 말하는 양체질은 금양, 토양, 목양, 수양체질이며, 음체질은 금음, 토음,목음, 수음체질
양체질은 장계(腸系)의 영향력이 강한 체질이고, 음체질은 부계(簿系)의 영향력이 강한 체질을 의미한다.

이 부분에서 정통 음양 이론에서는 오장을 음으로 육부를 양으로 설명하는데요 팔체질에서는 장을 양으로 부를 음으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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