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 책으로 따라가 보는 杏林書院 100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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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 책으로 따라가 보는 杏林書院 100년 (1)
  • 승인 2022.07.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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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56

 

종로5가에 청계천 쪽으로 씨앗상점들이 늘어서 있던 거리에 행림서원이 있었다. 그곳은 일견 책방이라기보다는 한방용품종합상점 같은 곳이었다. 나는 1982년에 한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선배들이 일러주는 대로, 예과 때는 그곳에서 논어집주, 맹자집주, 문답식역학원리강좌를 샀다. 책방을 지키고 있던 노부인께서 한의대 학생은 할인해 주셨다. 본과생이 되어 침구학을 배우던 때는 호침 등 각종 침 종류와 휴대용 침통을 샀다. 당시에는 1회용 멸균침이 보급되기 전이다. 임상 과목을 배울 때는 맹화섭 선생의 방약지침과 포켓판 방약합편을 샀다. 학기 초에 단체로 구입하는 교과서가 아니라면 한의대 학생들은 필요한 책이 있으면 행림서원에 갔다. 학교 앞에서 타면 종로통을 통과해서 가는 134번 버스가 있기도 해서 말이다. 최용태.이수호 교수의 정해침구학과 송병기 교수의 한방부인과학, 김상효 교수의 동의신경정신과학이 행림서원과 행림출판사에서 펴낸 교과서였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한의사 생활을 하면서, ‘내가 전공과 관련된 책을 낸다면 행림서원에서 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기도 했다. 시인이 되고픈 꿈을 접기 전에는 시집은 민음사였다. 그런데 인생이 참 묘하다. 2009년에 책 출판 일로 행림서원 이갑섭 사장을 알게 된 후에, 그의 소개로 민음사 박맹호 회장을 치료했던 적이 있다. 물론 나는 시인 될 꿈은 벌써 접은 후였고 그분께 시 한 편을 보여드리기는 했다. 구차한 거지만 약식으로 꿈을 이뤘다고 혼자 위로했다.

 

미키 사카에

미키 사카에1) 선생은 일본의 의사학자로서 19286월부터 19444월까지 한반도에 머무는 동안 한반도의 의학과 질병을 연구했다. 그의 탁월한 연구 성과를 정리한 저작이 제1조선의서지(1956)와 제2조선의사연표(1985) 그리고 제3조선의학사급질병사(1955)2)이다. 미키 선생은 이 3부작을 조선의지(朝鮮醫誌)라고 명명했다. 그는 조선의학사급질병사의 권두에서 연구에 도움을 준 인물들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였다.

조선의지의 완성을 고하기에 앞서 이 일을 해왔던 20년간은 긴 시간인 것 같으면서도 한 순간의 꿈과 같기도 하다. ~ 중략 ~ 그 사이 나의 연구에 깊은 지지와 후원 혹은 간곡한 지도와 가르침을 주신 여러 선생님과 선배님들은, 이제 다른 나라에서 살거나 혹은 사는 곳은 물론이거나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미 작고하셔서 오늘날의 이 성과를 보여드릴 수 없는 분도 적지 않다. 사뭇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여기에 존함을 남겨서 추억의 실마리로 남김과 동시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3)

여기에 나열된 52명의 인물 중에 이태호 형(李 泰浩兄)’이 있다. 그리고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설(四象醫說)을 설명하는 항목의 말미4)에 이렇게 썼다.

행림서원 주인 외우 이태호 씨가 저술했던 <동의사상진료의전>, 이제마의 원저작인 <동의수세보원>을 여러 각도로 해석하여 현대인이라도 이해하기 쉽도록 편찬된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사실 1941년에 행림서원에서 나온 동의사상진료의전은 원지상이 1929년에 펴낸 동의사상신편을 바탕으로 해서 타약수해례(他藥受害例), 편송결(便誦訣) 등을 추가하여 재편집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미키 선생이 자신의 책에 특별히 동의사상진료의전을 언급한 것은 두 사람의 사이가 각별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행림서원

행파 이태호 선생5)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서점에서 일을 배운다. 자성당서점(自省堂書店)이다. 이곳은 출판서적상이었다. 차차 능력을 인정받아 주무(主務)를 맡게 되었고 그러다가 주인이 된다. 1930년대에 안국동 157번지로 이전하면서 행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꾼다.1930년대부터는 출판을 겸했는데 선한약물학같이 한약종상 시험과 관련한 책들로 시작했다. 그러면서 향약집성방이나 침구경험방같은 전통적인 한의서를 펴냈고, <비장고판조선의서(秘藏古版朝鮮醫書)> 시리즈를 간행하고자 기획하는 등 한의서 전문 출판사로서 입지를 키워나갔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행림서원에서 발행한 의서 선전용 팸플릿인 의서총목록에는 40여 종의 의서가 수록되어 있다.

 

삼방촬요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안상우 박사는 행림서원의 의서총목록에서, 발간예정도서에 삼방촬요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경희한의대 의사학교실의 김남일 교수와 함께 행림서원 이갑섭 사장을 찾아간다. 20078월경이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혹시라도 삼방촬요가 고서창고 안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효종의 명을 받은 송시열이 팔도의 명의들을 소집하여 각자 경험한 침. . 약방을 강론하게 하고, 그것을 모아 편찬하여 삼방(三方)’이라고 불렀고, 삼방촬요(三方撮要)는 그 요점을 모은 것이다. ‘삼방과 관련해서는 어떤 역사문헌에도 그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역사학계는 물론 한의학계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원고더미 속에서 이갑섭 사장이 찾아낸 것은 삼방촬요의 출판허가를 받기 위해서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던 검열본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모든 출판물은 출판법에 따라 총독부 경무국의 사전 검열을 통과해야만 했다. 출판허가를 받은 날짜인 쇼와(昭和) 18(1943) 113일 허가인장이 속표지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런데 삼방을 처음 언급했던 사람은 바로 미키 사카에 선생이다. 그가 조선의서지를 통해서 삼방, 삼방촬요, 감삼신편에 대한 내력을 소개했던 것이다. 미키 선생은 책에서 자신이 이 중 감삼신편을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행파 선생이 삼방촬요필사본의 저본을 얻는 것은 최소한 19431월 이전이다. 그리고 미키 선생이 한반도를 떠난 때는 19444월이다. 미키 선생이 공개된 팸플릿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조선의서지에서 행파 선생의 소장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검열도 끝났던 그 원고가 출판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과 행파 선생을 배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삼방촬요의 발굴자인 안상우 박사는 마침 동의보감 4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을 때라 다른 일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몰락한 행림서원의 사세로 거질의 책을 출시하기에는 출판계 현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차일피일 시간이 흘러갔다. 2013년에 이갑섭 사장이 이제는 나이도 들고 또 앞일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서둘러 일을 추진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에 안상우 박사의 연구와 번역을 통해서 2017120일에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효종명찬 삼방촬요란 제목으로 3권짜리로 발간했다.

 

천일제염공업

행림서원은 1950년에 이봉희가 지은 천일제염공업을 발간했다. 아니 한의서 전문 출판사에서 천일제염이라니 좀 의아했다. 그러다가 단서를 발견했다.

행파 선생의 손자인 이갑섭6) 사장은 19766월에 한의학술잡지인 행림(杏林)을 창간한다.7) 행림은 한의계 전반의 학술을 모두 수용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는데, ‘학술란에서는 논문을 모으고, ‘동의일반에서는 각종 신치료법을 정리하고, ‘치험례에서는 임상연구와 성과물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특별기고’. ‘약초백과’, ‘편집낙수등의 시리즈를 기획하였다. 창간호에 당시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부속한방병원 시내분원장이던 박병곤8) 선생의 글9)이 실렸다. 그는 글의 서두에 행파 선생과의 만남에 대해서 기록했다.

수십년 전 일이지만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 가래동에 우거하시면서 그곳 삼괴지방 염전개발(천일염)에 최선구자로서 진출하신 분이다. 때마침 그 이 선생이 불행하게도 중풍 발병으로 와병케 되어 즉시 필자에게 병론을 상의코저 영식 고 이성모 선생(그때 고교생)을 보내셨기에 시골길 약 25리를 줄달음하여 행파 선생 댁으로 갔던 것이다. 고 이성모 선생은 바로 지금의 행림 사장 이갑섭 씨의 선친인 것이다. ~ 중략 ~ 선생의 병환은 호전의 기미가 있었고, 필자가 평소에 존경해 온 선생 병환이 위경은 모면케 되어 필자도 크게 안심했었다. 2,3일 후 다시 방문하였을 때는 선생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선생이 집필한 고금실험방 원고 약 2500매를 필자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는 행파 선생의 고향으로, 가래동은 가래골이라고 불렸는데 선생의 집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행파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간 것이 1943년이며 지병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이갑섭 사장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병곤 선생은 분명하게 화성에서 염전사업을 하던 행파 선생이 그곳에서 중풍이 발병했다고 기억하고 적었다. 수십년 전의 일이므로 년도와 날짜까지 특정하여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전후의 정황을 잘 알렸다고 판단한다. - 1343에 이어서 쓴다. -

참고문헌

1)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1963.

2) 행림창간호 1976. 6.

3) 김호, 의사학자 三木榮의 생애와 조선의학사급질병사」 『의사학272005. 12.

4) 김남일, 근현대한의학인물실록들녘 2011. 10. 26.

5) 안상우, 삼방촬요의 편찬과 전존 내력」 『한국의사학회지2018.

6) 유준상, 동의사상진료의전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 『사상체질의학회지2020.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三木榮(1903. 7. 25. ~ 1992. 12. 20.)
2) 사실 『조선의학사급질병사』는 독립적인 조선의학사와 조선질병사를 함께 묶은 책이다. 
3)해당하는 부분을 번역하였다. 
   미키 사카에 선생은 昭和 23년(1948년) 3월 3일에 이 책의 원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초판은 1955년에 공판(孔版)으로 100부를, 재판은 1963년에 활판(活版)으로 500부를 고향인 오사카에서 찍었다. 처음 책을 찍을 때 출판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수집했던 고서의 상당수를 팔았다. 
4)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再版) 1963. p.379
   해당하는 부분을 번역하였다.(번역 박병희)
5) 杏坡 李泰浩(1897. 4. 20. ~ 1963. 12. 11.) 
   행파 선생의 생몰은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 있었다. 행파 선생의 손녀인 평민사 이정옥 대표가 제적등본을 확인하였고 이를 바로잡는다.  
6)李甲燮(1950 ~ 2019)
7)1978년 7월까지 발간했고, 1978년 1월호부터는 잡지의 제호를 『한의약정보』로 바꾸었다. 
8)朴炳昆(1912 ~ 1989)
9)朴炳昆, 「杏林 交友記 및 中風에 對한 漢方臨床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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