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질병의 사회적 책임, 한의학의 역할을 생각하다
상태바
[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질병의 사회적 책임, 한의학의 역할을 생각하다
  • 승인 2022.09.09 04: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히준

박히준

mjmedi@mjmedi.com


도서비평┃아픔이 길이 되려면

한국 보건의료의 한 축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한의학계의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들을 위해 코로나19 한의학진료접수센터를 만들어 무료로 한의 진료 혜택을 나누어 왔고, 미혼모, 장애우, 다문화 및 이주민, 새터민 등 사회에서 소외될 수 있는 분들에게 꾸준히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계신 한의사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한의대생들 또한 노숙인, 독거노인 분들을 위한 의료봉사와 도시락 나눔 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의 다양한 의료사회 문제에 대해 한의학이 주도적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앞으로도 그 역할을 더욱 더 높여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최근 보건학을 공부하려는 한의대생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김승섭 지음, 동아시아 출간

한편 의료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의학이 기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의료사회문제가 왜 생기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단순히 치료하거나 개인적으로 돕는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가 왜 생기는지를 이해하고 그들 몸에 새겨진 상처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이런 연구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연구분야가 생겼다고 합니다. 바로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입니다.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으로, 세계 유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주기 시작한 지 십여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최근에 독립된 학문 분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사회의 다양한 현상과 아픔들이 어떻게 건강, 질병과 맞닿아 있는지 이해하고 어떤 대안을 마련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에 대해 일반적으로 (한의학을 포함하여) 의료기술로 해결해야 할 수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의료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의사이며 사회역학자인데요,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소신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차별 경험과 고용불안 같은 사회적 요인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연구한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는 중요 연구사례를 통해 어렵지 않게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직접 참여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소방공무원 실태조사,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 실태조사, 재소자 건강연구, 성소수자 건강 연구 등 자칫하면 사회적으로 민감하기도 하고, 아플 수도 있는 주제가 어떻게 건강과 질병에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자는 역학자답게 직접 연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담담하게 사실을 얘기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문제를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책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지만 책 전반에 저자의 따스한 시선과 진심이 느껴져 읽는 내내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문제 인식과 아픔의 기록은, 슬픔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질병 권하는 일터”를 “함께 수선”해 나가고, 그리고 재난과 같은 “슬픔”은 곧 새로운 “길”의 시작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속한 사회가 발전해 나간다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각각의 문제인식은 대안 마련과 문제해결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또 하나의 대안으로, 미국의 이탈리아 이주민 마을, 로세토의 낮은 심장병 사망률 연구결과를 보여주며, “공동체의 힘”과 건강과 질병에 대한 영향을 전합니다. 인간은 “연결될수록 건강한 존재들”인 것이죠.

책의 말미에 저자는 유학시절 후배들에게 쓴 글을 통해 왜 사회역학자로서의 소신을 이야기합니다.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이제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2년 반 동안 실습 이외에는 직접 만나기 어려웠던 한의대생들을 드디어 대면수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20대에 우연히 마주치는 책과 경험들은 나머지 인생에 큰 영향을 주곤 합니다. 심지어 삶 전체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저자의 경우에는 의대생 때 산업재해를 당한 분들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경험과 재활병원에서 사지마비 아이의 점심 식사를 먹여주는 활동 등이 지금의 연구자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번 학기에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 이 책을 학생들에게 권해보려고 합니다. 한의학은 한 가지의 증상보다 좀 더 넓은 시야에서 근원적인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합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개인이 속한 국가, 학교, 직장, 지역사회와 같은 공동체의 특성을 고려할 수 있다면 환자를 좀 더 잘 치료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의학 공부를 토대로 사회보건분야의 문제 핵심을 간파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리더들이 저희 학생 중에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박히준 / 경희대 침구경락융합연구센터 소장, 경희대 한의대 교수, 장-뇌축기반 맞춤형 침치료기전 연구실 PI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