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1030> - 『里鄕見聞錄』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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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1030> - 『里鄕見聞錄』 ①
  • 승인 2022.10.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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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answer@kiom.re.kr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동의보감사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의보감사업단에서는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왔다. 최근기고: 고의서산책


목숨만큼 소중한 심마니의 약속

  가을볕이 따사롭고 아직 풀색도 남아있지만 들판은 벌써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지난주 영주향토사 연구발표회에 강연을 마치고나서 풍기인삼엑스포에 잠시 들러 전시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세계사에 각인된 고려인삼의 명성이나 인삼을 애용했던 역사인물과 얽힌 갖가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도 재미있었지만 때마침 한창 수확철인 품질 좋은 생삼을 만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 『이향견문록』

  오래전에 『이향견문록』을 살펴보다가 마주친 심마니 이야기가 떠올라 이 책에 실린 한 採蔘人 이야기를 잠시 해 볼까 한다. 기실 이 책에 대해서는 「고의서산책」을 연재하기 시작한 초창기 간략하게 소개한 적이 있었지만, 이미 세월도 많이 지났거니와 너무 협소한 범주에서만 다루었기에 이참에 다시 다뤄볼 생각이다.(45회 잊혀진 陋巷의 醫人들-異鄕見聞錄·醫學卷, 2000.9.18.일자 참조.)

  원서는 10권 3책으로 되어있는데, 본문은 다양한 인물들을 행적에 따라 몇몇 부류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대개 권1~3 학행, 충효, 인품(智謀), 권4 열녀, 권5~7 문학, 권8 서화 및 권9 의학·卜筮·바둑·음악·역관(雜藝로 분류), 권10 승려와 道流 등 308인에 이른다.

  이 가운데 醫人으로서는 太醫 楊禮壽와 허준으로부터, 醫師 安德壽, 知事 柳瑺, 太醫 白光炫, 醫生 金應立, 老學究, 醫生 皮載吉, 申鍼醫, 醫生 崔雲(손자 崔倫, 증손 宗震), 同樞 李喜福, 醫生 宋學天, 醫師 趙光一까지 15명의 사적이 적혀있다. 앞쪽 몇 분은 기록이 남아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이름조차 잊혀진 陋巷人이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이들 의인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金採蔘人’이란 익명으로 기록된 한 심마니 노인의 예화이다. 곧 산삼을 캐는 일이 생업인 金姓노인의 일화로, 다른 2사람과 함께 백운산에 올랐다가 사면이 암벽으로 둘러싸인 깊은 골짜기아래 삼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셋이 합심하여 칡넝쿨을 잘라 새끼를 엮고 몸이 가벼운 김노인이 벼랑 아래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몇 차례 공들여 캔 삼무더기를 바구니에 담아 위로 올리고 나서 김노인이 다시 올라갈 때가 되자, 위에 있던 2사람이 돌변해 새끼줄을 끊어버리고 캔 삼을 가지고 줄행랑쳐 버렸다.

  절벽 아래 남겨진 노인은 혼자서 빠져 나올 길이 없어 갇혀 지낼 도리 밖에 없었다. 딱히 먹을 것도 없는지라 미처 캐지 못한 삼 뿌리를 씹으며 몇 날을 견뎠는데 삼을 먹은 탓인지 기력은 여전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바위를 타고 내려오더니 곁에 머물렀다. 노인은 허리띠를 풀러 구렁이 몸통에 묶고 절벽을 기어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이 뱀은 여느 뱀이 아니라 산신령이 보낸 사자가 현신한 것이겠지만, 이야기 초점은 그 다음에 있다. 

  요행이 목숨을 건져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는데, 노인을 버리고 도망쳤던 2사람이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어 가까이 가보니 무엇에 중독되었는지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다만 삼은 그대인지라, 급히 산을 내려와 변고를 알리고 삼은 공평하게 나눠주되, 자기 몫은 장례비용에 보태고 1뿌리도 취하지 않았다.

  노인은 90세를 넘겨서도 젊은이처럼 지냈으며, 아들 다섯에 증손까지 보도록 유복하게 살았다. 백수를 누리고 병 없이 지내다가 임종에 이르러서야 자손에게 이 일을 들려주며 선행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권선징악의 실지 사례를 전해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이리라. 마침 儒醫 李碩幹이 남긴 글 가운데, “믿음이란 말의 상서로움이다.(信者言之瑞).”라는 문귀를 보았다. 이 기쁜 가을날,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인삼축제에 들려 오랜 동안 코로나로 지친 심신을 상쾌하게 바꿔보는 것도 기약할 만한 여정일 것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동의보감사업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의보감사업단에서는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왔다. 최근기고: 고의서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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