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자유를 선택할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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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자유를 선택할 용기
  • 승인 2022.11.11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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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히준

박히준

mjmedi@mjmedi.com


도서비평┃길 위의 철학자

스무 살, 은총의 집에서 봉사를 같이 하던 친구 덕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을 만나고, 무엇인가 벽이 깨지는 듯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지중해의 한 섬에 살던 조르바와의 소설을 통한 조우는, 타인이 아닌 나의 기준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내 마음속 깊이 새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느꼈던 설렘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 아래에서 잊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스무 살 시절의 설렘을 다시 상기시키는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1902-1983)의 자서전, ‘길 위의 철학자’입니다.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이다미디어 펴냄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이다미디어 펴냄

에릭 호퍼, 그는 5세 이전에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총명했지만, 겨우 일곱 살 때 어머니와 시력을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만난 세상은 얼마나 어두운 세상이었을까요. 그러다 그는 기적처럼 15세에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는데요, 이때부터 언제든 다시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폭풍이 몰아치듯 책에 빠져들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참으로 가혹했습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게 되니 빈민가에서 홀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습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일용직 떠돌이 노동자가 되어 미국 전역을 전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조금의 돈이 모이게 되면, 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궁금한 분야가 생기면 수학, 물리학, 철학, 식물학 등을 가리지 않고 책을 통해 두루 섭렵했다고 하니, 앎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가 정말 놀랍습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간단히 소개해 보면, 원제가 “Truth imagined”인 이 책은, 저자가 긴 시간 떠돌이 노동자로 살며 부두노동자로 정주하기 전까지, 길 위에서 만났던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와 저자의 사유를 담은 27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자서전입니다. 원래 저는 자서전 읽기를 즐기지는 않는데요, 희한하게도 이 책은 소설보다도, 영화보다도 더 재미가 있어서 첫 장을 펴고 나서 쉼 없이 단번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에릭 호퍼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온전히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독학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상을 만들어 나간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독학한 부두노동자-철학자”, “사회철학자”, “프롤레타리아 철학자” 등으로 불리는데, 1960년대부터 30년간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노동현장과 사회 현실에 기반한 차별화된 철학적 체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도 흥미진진하지만, 무엇보다도 책을 읽다가 멈춰 오랫동안 생각하게 했던 그의 일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오랫동안 기억 하고 싶어 몇 번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너무 뛰어난 그의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레몬나무의 백화현상을 그가 해결했을 때, 캘리포니아대학 감귤연구소 소장을 하던 스틸턴 박사는 그가 연구소에 남아주기를 원했습니다. 또 깊이 사랑하게 된 헬렌은 그의 이론화하는 능력과 비범한 수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버클리에서 함께 공부하기를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안주하지 않고 바로 떠돌이 노동자의 길로 돌아갔습니다. 어찌 보면 두 경우 모두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기대를 정당화하는데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소비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본능적으로 아직 내가 정착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길 위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과 자유를 결연히 선택하는 에릭 호퍼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선택이 결국 그만의 독특한 철학적 세계를 완성시키는 근간이 되었겠지만, 당시의 그는 그런 성공을 염두에 두고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테지요.

스무 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느꼈던 설렘이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의 삶을 추구해가는 자유’에 대한 동경이었다면, 지금 에릭 호퍼의 삶에서 전해 온 감동은 ‘진정한 자유란, 달콤한 유혹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내 길을 선택하는 용기가 더해져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것인 듯합니다.

이번에는 다시 ‘길 위의 철학자’를 천천히 줄을 치며 읽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조만간 ‘맹신자들’, ‘인간의 조건’, ‘영혼의 연금술’과 같은 그의 다른 책들과도 조우해 보아야 겠습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많은 선택의 순간에 저는 그를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박히준 / 경희대 침구경락융합연구센터 소장, 경희대 한의대 교수, 장-뇌축기반 맞춤형 침치료기전 연구실 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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