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어느 런린이 교수와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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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어느 런린이 교수와 달리기
  • 승인 2023.03.10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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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히준

박히준

mjmedi@mjmedi.com


도서비평┃철학자와 달리기

저는 운동을 잘하지 못합니다. 음악에 음치가 있다면, 그야말로 “운치”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이 넘어가고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는 부상으로 배움이 필요하다 생각되어, 어느 달리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역시 페이스로도 지구력으로도 30명 중 30등입니다. 그래도 뭐가 좋은지 훈련을 따라 하면서 힘이야 들지만 계속 웃음이 나옵니다.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유노책주 펴냄

최근 코로나 팬데믹이 완화되면서 대면 마라톤 대회가 전국에서 봇물 터지듯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리기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3년 만에 돌아온 서울동아마라톤 풀코스를 신청하는 분위기에서, 덜컥 저도 신청에 동참하고 말았는데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회 다음 날에는 해부학 4시간 강의가 있는데 제 달리기 실력에 후유증으로 다음 날 강의가 불가능할 것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더구나 하프 코스도 해보지 못한 제가 완주할 실력이 안 되는 것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고민한 끝에 “취소” 버튼을 눌러 버렸는데요, 그런데, 손가락 움직임 하나가 참 이상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달리기가 마라톤 참가 취소 버튼을 누른 순간, 달리고 싶지 않더군요. 몸은 안 움직여지는데 나갈까 말까 망설임 속에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지더군요. 저에게 달리기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자꾸 물어보면서요.

잠시 달리기는 머릿속으로만 하고, 대신 술술 읽히지 않기에 잠시 미뤄두었던 “달리기와 철학자”라는 책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는 목차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인데요, 특히, “삶도 달리기도 자유를 찾아 나서는 일이다.”, “삶도 달리기도 놀이가 될 때 가장 가치가 있다.”, “삶도 달리기도 모든 의미와 목적이 멈출 때 시작된다.”라는 목차가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목차에 드러나 있듯이 철학자인 저자는 달리기를 통해 깨달은 삶에 대한 생각을 “현상학적 방법론”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저와는 다르게 평생 달리기를 해온 사람입니다. 고향 웨일즈에서 달리던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어 사랑하는 늑대 브레닌과 함께 프랑스 해변과 아일랜드 산을 누비게 되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중년의 그는 여전히 개 휴고와 함께 플로리다의 늪지를 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늘 잘 달린 것은 아닙니다. 후덥지근 한 날씨, 준비 없이 나간 마라톤 대회에서의 난감함, 달리는 과정에서 종아리 파열로 인한 고통 등으로 괴로웠던 경험도 많지만, 사랑하는 늑대와 개 (브레닌, 니나, 테스, 휴고) 덕분에 지금까지 달릴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달리기는 특별한 것이 없는 행동입니다. 오랜 시간 발을 교대로 앞으로 내딛고 팔을 흔드는 움직임의 연속일 뿐입니다. 달리기에 대해 얘기할 때, 보통 사람들은 달리기에 대한 효용성을 얘기하곤 합니다. 즉, 건강을 위해서, 살을 빼기 위해서, 또는 취미생활을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달리기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 거창하게 “달리기는 단순히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인류 차원의 의미가 있는데, 과거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달리기에 적합하게 진화해 왔다.”고 말합니다.

반면 저자는 “달리기의 중요성은 이런 내용이 아니라 그 속에 품은 의미에 있다”고 말합니다. 달리기가 무엇인가에 기여하는 효용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공리주의에 갇힐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효용성이라는 기준에서 보고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모든 것을 효용 또는 해악을 기준으로 판단하다 보면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저자는 오랜 달리기 끝에, 달리기 경험에서 저자가 느끼고 생각하게 된 내재적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대상이 본질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그로 인해 소유할 수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뜻”이며, 현실적으로 “평생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목적과 수단의 쳇바퀴를 돌며 손에 잡히지도 않는 가치를 좇아 달리는” 우리이지만, “잠시라도 그 속에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방법은 달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달리기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다는 저자의 의견이 흥미롭습니다. 달리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팔다리 동작이지만, 처음에는 주변 환경이 변화하는 것에 주목하게 되고, 좀 더 지나면 자신의 내면이 보이고, 좀 더 달리다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상태가 되곤 합니다. 소박하지만 저에게 있어 달리기란 살아 있음을 일깨워주는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있는 한 그저 피크닉처럼, 놀이처럼 일상에서 달리기와 함께 할 수 있으면 참 좋을 듯합니다. 이유가 너무 심심하다구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저는 선수가 될 사람은 아니거든요. 오늘은 달리기 모임에서 처음 인사할 때, “밥숟가락 들 힘만 있다면 그때까지 달려 보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시 발을 힘차게 움직여 달리러 나가 보겠습니다.

 

박히준 / 경희대 한의대 교수, 침구경락융합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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